"저예요. 막 나가려는 참이었는데. 이걸 두고 왔지 머에요."
"아.. 아가씨군요. 일찍 나가시네요. 저희가 서둘러 먹고 왔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아린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보안 요원은 무언가를 잘못한 죄인처럼 몸을 조아렸다. 아린은 최대한 평소처럼 철문을 나와 닫고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갔다. 보안 요원은 아린의 손에 든 바구니를 유심히 보았다.
"아.. 아가씨. 그 바구니는 무거우시면 가시는 곳까지 대신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린은 잠시 멈칫하며 뒤를 돌아 웃으면 대답했다.
"괜찮아요. 오늘 전공 교수님과 첫인사가 있어서 미리 준비했어요. 아버지가 특히 강조하셔서요. 성의만 받을게요!"
보안 요원은 멋쩍은 듯이 아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머리를 조아렸다. 철문 안에 준아는 아린 덕분에 위기는 모면했으나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준아가 경비 아저씨를 다시 찾아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청소부들의 사물함이 있다고 했었다. 청소부도 실수로 휴대폰을 놓고 나왔을 난감한 상황이 있을 것만 같아서 경비 아저씨에게 사정해서 받은 방법이 바로 이 15분의 보안 요원의 식사시간 타이밍이었다. 아저씨 말에 따르면 저녁시간 때까지는 철문을 나갈 틈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준아는 혹시 누군가라도 나타날까 싶어 벽에 등을 바짝 기대어 소리 없이 움직였다. 1층만 해도 규모가 워낙 넓어서 전부 돌아보는 데만 한 참 걸릴 듯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획처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 바로 이곳에서 저 기획처장을 만났었지.' 당시 기획처장이 가리켰던 사진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아린은 어릴 때부터 귀여운 외모였고 어머니의 미모를 꼭 빼닮은 듯 보였다.
대각선 쪽에 위치한 안쪽 방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의 크기로 보았을 때 상당히 넓은 방일 것으로 보였다. 무언가 보고를 하고 있는 듯한 기획처장의 추임새를 보니 혹시 저기에 바로 총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숨을 곳을 찾는 것도 찾는 거지만, 저 방의 주인이 누굴까가 더 궁금해졌다.
'큰 룸은 보통 옆문이나 뒷 문이 있기 마련이지.'
준아는 벽을 타고 방 주변을 빙- 돌아보았다. 그러다 창문이 달려 있는 옆문을 찾았다. 창문 가까이에 그림자가 비칠까 싶어 몸을 낮추고 천천히 다가섰다.
총장 윤승호는 중년의 깊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기획처장과 중대한 논의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 한영대의 미래를 이끌 차기 총장을 찾습니다. 학생 여러분 모두가 바로 지금 이 자리의 후보자입니다. 학생이 주인이 되는 한영대학교. 이 멘트를 잘 담아줘요."
"네, 총장님, 각 단과대학 교직원들을 통해 전체 학생들에게 공지하겠습니다."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획처장이 수고가 많아요."
기획처장은 폴더 인사를 하고 총총걸음으로 나간다. 기획처장을 지그시 쳐다보는 총장은 휴대폰으로 아들 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혁아, 애비다. 이게 최선이다. 제대로 덮어 씌울 놈을 한 번 찾아보자고."
IT대학 학생회실에는 재훈, 지현, 태오가 모여 준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게 뭐야. 그렇게 반응이 뜨거웠건만. 알맹이는 쏙 빼고 이런 편파 기사가 다 있지? 원래 이런 건가."
게시판에 올라온 학보 기사를 보고 흥분한 태오는 학생회에 몸 담고 있는 재훈과 지연을 향해 괜히 화풀이를 했다.
"기다려봐. 오히려 더 잘된 거니깐."
지연은 모니터를 노려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준아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미안! 지각이지? 많이 기다렸지."
"야, 어디에서 과외 알바라도 하구 온 거냐. 연락도 안되고."
태오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이고, 말도 마라. 종일 고생하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준아는 결국 경비 아저씨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아저씨는 준아의 점괘대로 정보를 얻으러 경비실들을 모두 전전했었다. 그러다 부재중인 사범대학 경비실에서 로테이션 계획표를 발견했다. '그 학생 용하네-' 감탄하고 있는데 준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준아의 요청대로 보안요원들이 철문 앞을 비울 때까지 망을 봐주었다. 준아는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본관을 탈출할 수 있었다.
"준아야, 이리 와서 이거 봐봐. 이 여학생이랑은 잘 아는 관계야?"
지연의 물음에 준아는 당황한 듯이 태오와 재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그게 중요하다는 건 아니고. 저 여학생이 총장 딸이라고 소문이 돌고 있어. 그래서 오히려 홍보 효과 측면에서는 좋단 말이지. 마치 평범한 회사원이 로열패밀리와 만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학생들에게 관심을 끌기에는 유리한 거지."
"아, 그래? 그럼 친해져도 되는 거야?"
준아의 순진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좋아하는 여자의 사진을 보자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학교 측에서 싫어할 거야. 얘기가 도는 게 좋을 게 없을 테니. 아마 벌써 손을 써 놓았을 걸. 소문은 이 게시판의 선을 넘지는 못할 거고. 그 보다 준아 네 당선을 막을까 봐, 그게 문제야."
준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그래도 그건 각오하고 있어. 어떤 자들인지 벌써 몇 번이나 겪어 봤으니."
네 명은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두 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선거 전략을 구체화했다. 역시 지연은 선거 홍보의 프로급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준아는 아침부터 고생한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에 진정 어린 감사를 표했다. 다들 피곤한지 순순히 집에 가겠다고 하자 전철역 입구까지 마중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니 왜 인지 모를 힘이 솟구쳤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돌아 서서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는 것처럼 노천극장 쪽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