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관람 후기
핵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한 지 45년이 흐른 어느 날. 호주대륙 한가운데 황무지에서 유일하게 남은 푸른 땅(Green Place)에서 복숭아를 따는 소녀 2명이 있습니다. 그때 죽은 말을 가져가려는 바이커족을 발견하고 용감하게 다가갑니다. 그들이 무리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바이크의 연료관을 자르다 그만 납치되고 맙니다. 퓨리오사의 어머니는 딸의 호각 소리를 듣고 추격에 나서고 바이커족의 본거지까지 가서 딸을 구해내다 그만 잡히고 맙니다. 퓨리오사는 도망치라는 어머니 말을 안 듣고 다시 돌아왔다가 그만 바이커족의 수장인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에게 붙잡혀 어머니가 죽는 것을 지켜보고 강제로 그의 수양딸이 됩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년이 흘러 바이커족은 우연히 물과 식량이 풍부한 시타델이라는 곳을 찾습니다. 전편의 빌런인 임모탄 조가 지배하고 있던 바로 그곳이죠. 세상이 멸망한 뒤 서로 모르고 살다가 일종의 문명의 충돌이 생긴 겁니다.
여기서부터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가 왜 삭발을 한 채 임모탄 조의 사령간이 돼서 전투트럭을 몰고, 왜 왼팔에 기계 의수를 하고 있는지, 왜 임모탄의 여자들은 홀로 깨끗한 옷을 입고 잘 지내다 퓨리오사와 함께 탈출을 감행하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2015년에 개봉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스핀 오프이자 프리퀄입니다. 전편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던 퓨리오사가 어쩌다 그렇게 됐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퓨리오사가 올드보이 최민식처럼 오랜 기간 준비하고 애를 써서 탈출했다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못 보신 분이시라면 세계관 이해를 위해 아래 영상을 한번 보시면 좋습니다. 새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https://youtu.be/rsbpIdom6hQ?si=ug14Cs88t02HJPtC
이제부터 약간의 스포일러가 섞여 있습니다.
2015년에 개봉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혼자 돌아다니다 시타델에 붙잡혀서 피주머니로 전락한 맥스가 퓨리오사의 탈출에 어쩌다 얽히면서 함께 대탈주극을 벌이고 다시 시타델로 돌아오는 사흘간에 벌어진 일을 보여줍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다른 생각을 할 틈 없이 휘몰아치는 액션 그 자체였습니다. 장대한 사막의 모래 폭풍을 뚫고 달리는 요새 같은 거대한 수송트럭인 전투트럭과 호위하는 워보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는데 여기에 달려드는 약탈자 무리들과의 전투, 퓨리오사가 탈출을 위해 방향을 틀면서 동료에서 적이 된 워보이들과 빨간 내복의 기타맨을 앞세운 임모탄 조와의 장대한 전투는 정말 시청각적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인 맥스보다 더 기억에 남던 퓨리오사는 왜 탈출을 했다 다시 시타델로 돌아오는 선택을 했으며, 왜 다른 여자들과 달리 사령관이 됐고 왜 왼쪽 팔을 잃고 의수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습니다.
새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 그 의문을 해소해 줍니다. 어릴 적 납치됐을 때부터 서서히 성장하며 신분을 숨기고 사령관(이 영화 속에선 근위대장이 되는 데까지 나옵니다)이 되는 15년간의 서사를 보여줍니다.
어떤 분들은 전편에 비해 별로라고 하더군요. 어쩌면 러닝타임 내내 액션으로 가득해서 흥분 상태로 극장을 나왔던 전작에 비해 퓨리오사의 성장 서사가 주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이 점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납치되어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오직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성장한 것이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퓨리오사였습니다. 전작에서 나름 임모탄 조에게 신뢰받으며 잘 살고 있는데 왜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했는지와 혼자 탈출하지 않고 여자들을 모두 탈출시킨 것인지도 설명이 됩니다. 퓨리오사라는 인물에 집중해서인지 영화 후반 시타델과 바이커족의 40일 전쟁이라는 큰 사건을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고 마지막에 퓨리오사와 디멘투스의 1:1 대면으로 압축합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스토리가 탄탄하고 액션이 약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사막에서 달리면서 싸우고 처음 제작된 전투트럭에서의 액션은 전작보다 더 다양한 공격을 다양하게 막아냅니다. 그리고 시타델 외에도 가스 타운과 무기 농장이라는 다른 곳에서의 전투도 숨 막히게 몰아붙이며 묘사했습니다.
전작이 임모탄 조와의 싸움 위주였다면 이번엔 디멘투스가 이끄는 떠돌이 바이커족들과의 전투가 주를 이룹니다. 임모탄 조에 비해 디멘투스와의 싸움은 약간 배트맨에게 덤비는 조커 같은 미치광이와의 싸움이라 조직적이지도 않고 예측 불가한 싸움이라는 또 다른 액션을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졌던 의문 중 하나는 퓨리오사가 몰래 간직하고 있는 복숭아씨의 의미입니다. 납치된 퓨리오사를 어머니가 구해주면서 도망가라고 할 때 반드시 고향으로 가지고 가라고 했던 바로 그 복숭아씨입니다. 머리카락 안에 숨겨서 항상 가지고 있다가 머리를 깎으면서 입 속에 넣어서라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퓨리오사의 놀라운 복수극의 힌트이니 유심히 지켜보세요. 수미쌍관의 연출로 절묘합니다.
퓨리오사의 머리카락도 매우 상징적입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시 기르고 또 한 번 자르는데 아주 중요한 결단의 순간들입니다. 처음 잘랐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 절벽아래로 떨어지다 나뭇가지에 걸리는 장면 역시 중요한 상징입니다.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고 여성의 긴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젊음과 의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슬람교에선 여성들의 머리카락이 남성을 유혹한다 하여 히잡으로 가리게 하죠.
이렇듯 퓨리오사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성의 상징으로 그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는 총 3가지 자치구역이 나옵니다. 마치 삼국정립처럼 세 구역이 절묘하게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물물교환을 하며 살아갑니다. 협조를 하면 문명을 재건할 수 있겠지만 매드 맥스의 세계관은 서로 싸우며 독점을 하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입니다. 3가지 구역과 별도로 떠돌이 바이커족이 있습니다.
주요 세력들과 등장인물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1. 3개의 주요 지역
1) 물과 식량이 풍부한 시타델(Citadel)
- 임모탄 조를 신처럼 숭배하는 1인 독재 체제로 그의 가족들, 호위부대인 워보이들은 절벽 위에 살며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양을 조절하여 땅에 사는 대부분의 비참한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2) 석유가 생산되는 가스타운(Gas Town)
- 시타델과 동맹관계로 주변이 해자로 둘러싸여서 다리 하나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중세 성 같은 구조입니다.
3) 무기를 생산하는 무기농장(Bullet Farm)
- 땅에 묻힌 광물과 전쟁 후 묻힌 무기들을 캐내는 곳으로 워보이들도 위험하게 느끼는 곳입니다.
2. 3가지 집단이 상징하는 것들
1) 바이커족
- 이름부터 로마식인 디멘투스는 세대의 바이크를 연결해서 로마의 삼두전차를 연상케 합니다.
- 디멘투스는 임모탄 조와 달리 유랑집단의 리더이면서 어딘가 포퓰리스트적인 면모도 있습니다.
- 역사가를 먼저 앞세우고 연설하는 모습은 히틀러와 괴벨스의 관계 같기도 하고 로마 장군이 개선행진할 때 앞에서 Memento Mori를 외치는 노예를 생각나게도 합니다.
2) 임모탄 조와 워보이들
- 임모탄 조는 디멘투스와 달리 왕이자 워보이들이 숭배하는 살아있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 워보이들은 임모탄 조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며 '나를 기억해 줘!'를 외칩니다. 그리고 죽으면 발할라로 갈 수 있다고 황홀해합니다. 북유럽 신화의 발할라이기도 하고 IS가 어린 전사를 뽑으며 죽으면 천국에서 많은 미녀와 지낸다고 믿게 만드는 것과도 겹칩니다.
- 전작에서 퓨리오사가 고향에 돌아가서 처음 만나 반기는 인물의 이름이 발키리입니다. 발키리 역시 북유럽 신화에 나오고 마블의 토르에서도 발키리가 나오죠. 이번 영화에서 발키리가 잠깐 나옵니다.
3) 에덴동산과 이브
- 풍요로운 땅에서 복숭아를 따다 납치되는 것은 누가 봐도 성경의 에덴동산을 떠오르게 합니다.
- 영화 유튜버들에 따르면 탈출했던 그리스 신화에서 하데스에 납치됐던 페르세포네를 연상케 한다고 하더군요. 페르세포네의 어머니는 농업의 신으로 딸이 납치되자 시름에 빠져 농작물이 모두 시들죠. 결국 제우스가 헤르메스를 보내 구해오려 하지만 하데스의 계약으로 명계의 음식인 석류를 먹은 페르세포네는 1년 중 6개월은 지상에, 6개월은 명계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석류는 신화에선 명계의 음식이기도 하지만 씨가 많아 동서양에서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 전편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간 퓨리오사가 푸르름이 모두 사라진 그린 플레이스를 발견하고 다시 시타델로 되돌아오는 결말을 맞습니다. 석류 대신 복숭아씨를 계략이 아닌 어머니의 마지막 염원을 담아 간직하죠.
전작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퓨리오사는 제가 손에 꼽는 영화 속 여성 캐릭터였습니다. 안야 테일러-조이는 퀸즈 갬빗 등에서 보여준 섬세한 연기로 제가 참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입니다. 키가 180cm에 육박해서 남자랑 싸워도 충분히 이길 것 같은 샤를리즈 테론에 비해 안야 테일러-조이는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가냘펴 보이다 보니 액션을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습니다. 하지만 다 보고 나니 걱정은 사라졌고 제 기대 이상으로 잘 해냈습니다. (심지어 무면허로 거대한 전투 트럭을 몰았다고 하네요^^)
이름부터 분노(Fury)가 들어간 퓨리오사가 분노를 가슴속 깊이 숨긴 채 기나긴 탈출과 복수를 계획하는 과정을 액션은 물론 섬세한 감정연기까지 소화해 냈습니다. 특히 성인이 되어 머리를 깎을 때 장면은 아저씨의 원빈을 모티브로 삼은 것은 아닌가 싶기까지 할 정도로 비장미가 넘쳤습니다.
퓨리오사의 증오심과 기나긴 복수와 탈출계획을 세우도록 만든 첫 번째 인물은 디멘투스입니다. 크리스 헴스워스가 연기한 디멘투스는 마치 김지운 감독의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세 놈을 다 섞어 놓은 것 같아서 만만찮은 빌런의 조건을 갖췄습니다. 처음 퓨리오사를 만났을 때는 자비로운 듯도 보이다가 도망치다 잡힌 부하들을 선착순으로 싸우게 해서 서로 죽이고 일부만 살아남게 하는 등 누구 못지않게 잔인합니다. 반면 죽은 딸의 곰인형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면도 있습니다. 이름 Dimentus는 영어로 치매를 Dimentia라고 하듯이 배트맨의 숙적 조커처럼 정신이 나간 듯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퓨리오사가 복수하는 장면에서 이 정신 나간 캐릭터는 이런 내용으로 도발합니다. "네가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난 하나도 안 아프고, 나를 죽인다고 해도 네 엄마가 살아서 오진 않아. 약 오르지?" 이러면 때리는 사람도 멘탈 나갑니다. 여기서 퓨리오사는 생각을 바꿔 기괴하면서도 놀라운 방식으로 복수의 방식을 바꿉니다.
분장으로 코를 높이고 목소리도 톤을 높여서 연기하다 보니 모르고 보면 크리스 헴스워스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던 머리카락 색이 시타델을 찾아가면서 붉은색이 됐다가 마지막에 흑화 해서는 검은색으로 변하고 스스로 다크 디멘투스라 칭합니다. 머리카락 색에 따라 디멘투스가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이 바뀌어가는 걸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런 종잡을 수 없고 겉으로는 대단한 듯하면서도 자신이 살려고 부하들을 이용하는 찌질한 모습과 마지막엔 퓨리오사를 도발하는 다중적인 모습을 이렇게 잘 연기할 줄 몰랐습니다.
매드맥스 시리즈는 조지 밀러 감독이 1979년, 1981년, 1985년 세편을 내놓고 무려 30년이 지나서 새로운 시리즈를 내놓은 유서 깊은 프랜차이즈입니다. 너무 오래전에 주말의 명화로 1편을 보고 2,3편은 본 기억조차 나지 않아 검색을 해봤습니다.
아직 세상이 멸망하기 전 경찰이었던 맥스가 들고 다니는 총과 비슷한 총열이 긴 더블 배럴 권총을 퓨리오사가 가지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매드맥스 2에 나온 여전사 캐릭터가 있더군요. 퓨리오사 자체를 떠올리게도 하고 어릴 적 퓨리오사가 납치될 때 어머니가 뒤를 쫓으면서 석궁을 쏩니다. 역시 겹쳐 보이네요.
디멘투스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간달프를 닮은 외모의 역사가 노인이 있습니다. 디멘투스는 다른 종족과 마주쳤을 때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전에 역사가가 디멘투스를 찬양하며 소개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매드맥스 2에서 폭주족의 두목 휴멍거스가 역시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하고 그전에 토디라는 인물이 찬양하며 소개한다고 합니다. 전작의 오마주일까요?
이번 새 영화가 흥행이 잘 안 되나 봅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재미없거나 듄처럼 어려운 세계관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파묘나 범죄도시가 1,000만을 넘기고 있는데 말이죠. 어렵기로 따지면 파묘가 더 어렵고 액션의 쾌감이나 스케일은 퓨리오사가 몇 단계 위라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이는 어쩌면 듄 2에서도 썼지만 아이맥스, 돌비 시네마 등으로만 편중되고 있는 현상 때문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부터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S플렉스관에서 봤습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큰 화면과 돌비애트모스 음향으로 볼 때 쾌감은 일반관에서 보는 감흥보다 확실히 뛰어납니다.
하지만 일반관에서 봐도 나중에 TV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관람 경험을 줄 겁니다. CG를 최소화하고 광활한 사막에서 찍은 액션을 제대로 즐기려면, 최소한 가슴을 울리는 음향 때문에라도 극장에서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아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아주 자연스럽게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퓨리오사가 어떻게 탈출을 실행했는지가 나오니 끝까지 보시길 바랍니다.
조지 밀러 감독은 1945년생입니다. 우리 나이로 올해 팔순입니다. 이번 영화에 매드맥스 사가(Mad Max Saga)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건 더 긴 스토리가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내한 인터뷰 영상을 보니 여전히 정정하십니다만 그래도 제발 최소 90까지 건강하게 사셔서 후속작 3편 정도 찍어주실 수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