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감상기
이전에 <듄> 감상기에 고백했듯이 저는 SF소설과 영화를 좋아합니다. 특히 하드 SF를 좋아하는데요. 원작 소설을 읽으며 영화가 나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기에 개봉 며칠 뒤 너무나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후 각종 영화 유튜버들과 과학자들의 리뷰를 보고 나니 또 보고 싶어 져서 주말에 두 번째로 봤습니다.
영화를 두 번째 볼 때는 첫 번째 볼 때 못 본 장면과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데 이번엔 그런 발견보다 감정적으로 더 증폭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감상 후기를 써보겠습니다.
어릴 적 ET를 봤을 때 우리 친구 외계인이 못된 어른들에게 잡혀가지 못하게 어린 친구들이 힘을 합치는 모습에 가슴을 조이며 응원했고, ET가 고향으로 떠날 때는 나의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슬픔을 느꼈죠.
어른이 되어 외계인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 영화는 아마도 이 영화가 처음일 겁니다. 영화 리뷰를 보면 돌덩어리 같이 생긴, 얼굴도 없는 외계인 로키 때문에 울었다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저도 두 번째 봤을 때 울지는 않았지만 울컥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마션과 마찬가지로 위기에 처한 주인공이 과학적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내용입니다. 마션은 화성에 고립된 주인공이 스스로를 구하는 내용이지만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주인공 그레이스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강제로' 우주를 구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스트로 파지'라는 빛을 먹는 우주 박테리오 파지가 우주 전체에 퍼졌고 지구도 이대로 가다간 빙하기가 닥쳐 모두 죽어갈 위기인데 유일하게 감염되지 않은 별 '타우세티'를 발견했습니다. 최소한의 연료와 최소한의 인원으로 떠나서 해결책을 찾아와야 합니다.
혼수상태로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한 후에 깨어난 그레이스 박스는 다른 승무원들은 죽고 혼자 남아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다 똑같은 처지의 40-에라다니 행성에서 온 외계인(에리디언), 로키를 만납니다! 이제부터 그레이스와 로키가 서로 알아가면서 협력하고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앤디 위어의 소설은 항상 유머러스해서 좋습니다. 주연 라이언 고슬링은 유머러스하며 용기라는 유전자가 없다고 자처하는 소시민적 캐릭터를 잘 소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타의에 의해 우주에 던져졌지만 책임감과 호기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그레이스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로키 때문입니다. 외계인 엔지니어로 지구와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진화했지만 역시 책임감이 있고 무엇이나 뚝딱 잘 만들어냅니다. 나중엔 지구인의 유머도 이해하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레이스를 구해냅니다. 얼굴도 없고 돌로 된 거미 같이 생겼지만 누구보다 듬직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상대방의 결정을 위해 오래오래 기다려줄 줄도 압니다.
반면 그레이스를 우주로 보내는 지구인들은 참 비인간적입니다. 아니 외계인도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비생물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들이 정말 실제처럼 묘사된 영화를 보면서 감동받고 박수 치게 되는 영화였습니다.
감독은 CG를 최소화하고 로키를 비롯한 우주선 세트를 모두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로키는 줄 인형으로 만들어서 여러 명의 인형술사가 직접 조작을 하고 그중 한 명이 로키의 목소리(컴퓨터로 번역한) 연기도 했습니다. 우주 유영 장면도 그린 스크린이 아니라 LED 스크린 앞에서 촬영해서 배우가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죠. 비하인드 스토리는 아래 링크한 유튜브로 갈음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레이스와 록키 둘이 거의 이야기를 끌어가면 지루해질 수 있는데 영화에선 과거 지구에서 있던 일을 교차 편집해서 지루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구에서도 외톨이던 그레이스가 점점 록키와 교감을 나누며 우주를 구하기 위해 변해가는 모습을 교차편집을 통해 납득이 가도록 했습니다.
https://youtu.be/VN3ILkRO0Mc?si=0Rij7obiI0SbF6T5
사실 소설을 읽으며 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 너무 궁금했었습니다. 대부분 주인공 그레이스와. 외계인 로키 둘만 나오는 데다, 소설에서 묘사한 로키를 영화로 어떻게 만들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이보다 잘 만들기도 힘들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로키는 애초에 작가가 이렇게 상상하며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고요. 로키 피규어가 나온다면 사고 싶어질 정도로 사랑스러웠습니다.
장편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어쩔 수 없이 생략한 부분도 있고 소설 원작에 없는 부분도 일부 들어있지만 충분히 이해 가능했고 혹시 과학적 지식이 별로 없더라도 이해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과학적인 사실에 상당히 충실합니다.
빛을 먹는 아스트로 파지를 발견하는 설정부터 그들이 금성으로 향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과정 등이 자칫 재미없을 수 있는데 재미있게 잘 표현했습니다.
우주선에서 인공중력을 생성하기 위해 우주선이 회전하며 원심력을 이용하는 설정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부터 오래된 아이디입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는 우주선의 일부를 케이블로 길게 늘여서 일부가 회전한다든가, 회전속도와 방향을 바꾸면서 중력을 조절하는 설정이 신선했습니다. 후반에는 이로 인해 결정적인 사고도 나지요.
로키 역시 그들이 사는 행성 에리드가 너무 두꺼운 대기로 인해 빛이 전혀 투과되지 않아 로키의 종족은 눈이 없고 대신 소리로 위치와 형태를 파악하는 에코로케이션이 발달했다는 설정도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꺼운 대기 때문에 대기압이 29 기압이고 체온이 200도를 넘으며 신체 구성이 금속과 실리콘이 대부분이라는 설정도 신선하면서 설득력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중간 과정을 많이 생략했지만 로키가 내는 화음을 퓨리에 변환을 거쳐 단어 단위로 치환하는 아이디어라든가, 아스트로 파지를 먹어치우는 '타우메바'가 질소를 만나면 죽자 조금씩 질소에 노출시키며 살아남은 개체를 번식시켜 진화를 유도한다든가 하는 설정은 실제로 과학자들도 하는 방식입니다.
우주 영화는 경이로운 장면들이 꼭 나오는데요.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 가르강튀아를 마주할 때가 그랬습니다. 포식자 세포 '타우메바'를 채취하기 위해 행성 에이드리안의 접근해서 선외활동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적외선 카메라 모드로 바꾸는 순간 너무나 환상적입니다. 아이맥스관에서 보라는 이유를 알겠더군요.
소설과 조금 다른 부분 중 인상 깊었던 장면은 우주로 떠나기 전 파티를 할 때 프로젝트 총책임자 에바 스트라트(산드라 휠러)가 노래를 하는 장면입니다. 바늘로 찌르면 1mm도 안 들어갈 것 같은 스트라트가 밖에서 그레이스와 대화를 나눈 뒤 들어와 Harry Styles의 Sign of the Times를 부릅니다.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우주비행을 앞둔 가운데 너무나 찰떡인 노래 가사입니다. 노래도 참 잘하더군요. 그런데 이 장면은 시나리오에 없었고 라이언 고슬링의 권유로 즉석에서 불렀는데 그대로 영화에 담겼다네요. 당연히 소설에도 없는 장면이고 소설에선 더 냉정한 인물로 그려져 있는데 이 장면으로 인해 그녀도 인간적 고뇌가 있긴 하구나 라는 느낌을 받게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레이스가 로키의 짝 이름을 지구식으로 '에이드리언'으로 지어줍니다. 그리고 타우메바를 채취하러 간 행성 이름도 에이드리언으로 이름 짓습니다. 그런데 왜 에이드리언일까요? 영화 록키를 보신 분이라면 아실 수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 록키의 애인 이름이죠. 젊은 분들은 그것까지 아는 분은 별로 없겠죠?
그냥 넘어가도 좋겠지만 T인 저는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합니다.
교사인 그레이스가 빛의 속도를 물어볼 때 학생이 km/s 단위가 아닌 마일/s로 답변하는데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다. 역시 미국인이죠. 질량은 kg 단위로 이야기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우주선 내부에 금으로 된 음각화 패널들이 붙어 있는데요. 인류의 진화 단계와 지구와 태양계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죠. 그런데 인류의 진화 과정이 유인원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진화 모델은 과거의 생각이었고 현재는 이렇게 선형적으로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소설과 영화에서 중력을 만들기 위해 우주선을 회전시켜 원심력을 발생시킵니다. 상황에 따라 중력과 무중력을 오가고 그로 인해 영화 후반 사고가 나는데요. 이 과정이 영화에 묘사는 되어 있지만 설명은 하지 않아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앞서 저는 하드 SF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보통 하드 SF는 암울한 미래나 유머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마션과 함께 하드 SF에서 보기 드문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적 재미와 비주얼까지 뭐 하나 흠집 잡기 힘든 영화였습니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영화일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안 보신 분이라면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가능한 한 큰 스크린과 좋은 음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음악도 너무 좋거든요. 요즘도 Sign of the Times를 자주 듣고 있네요.
설레발이겠지만 내년 아카데미상에서 꽤 많은 부문 후보에 지명될 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