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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Dec 26. 2022

LP 바를 다녀와서 뻗어나가는 생각의 타래들

기분 좋은 사고의 확장. LP바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떠올린 생각들

0. LP 바를 다녀와서

제주도 애월에 있는 LP바 '마틸다'

제주도 애월에 있는 '마틸다'라는 LP 바에 다녀왔다. 한 벽면이 레코드판으로 가득 찬 가게에서 사장님이 신청곡을 받아서 순서대로 노래를 재생해 주셨다. 이전에 서울에서 LP 바를 갔을 때도 기분이 좋았기에, 이번 제주여행 1일 차의 마무리를 이곳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나는 'Carpenters'의 'close to you'라는 노래를 신청했다.


원래도 이어폰, 스피커 쪽으로 관심이 많기도 하고 노래도 좋아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LP판을 보면서 노래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이 LP판을 향해 점점 파고들기 시작했다. 음악 감상만 하더라도 부족할 시간이긴 했으나, 생각의 타래를 엮어나가는 것 또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이기에 아래에 두서없이 LP판과 소리, 음악에 대한 생각들을 남겨보고자 한다.

 

1. 소리란 무엇인가부터 시작는 이야기


LP판, 노래, 가수, 악기 등에 대한 생각이 뻗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소리라는 근본적인 개념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는 기본적으로는 공기를 매질로 한 파동이자 진동이다. 이 자극을 통한 고막의 진동으로 우리는 소리라는 존재를 인지할 수 있고, 이를 인간의 오감 중 하나인 청각으로 설명한다.


소리라는 개념이 없던 태초부터 소리는 존재해왔을 것이다. 결국은 어떤 행동의 부산물로 진동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리를 내려고 하지 않더라도 소리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돌이 굴러가면서 나는 소리, 파도가 치는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등과 같이 말이다.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가 이를 인지하고 활용하게 되는 것은 그 이후의 단계였을 것이다.


파도치는 소리가 나는 곳에는 물이 있을 것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어떤 존재가 움직이고 있음을 암시할 것이다. 각 동물들은 필요에 의해 이런 소리들을 인식하고 분류할 수 있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이를 현대의 사례로 연결한다면 게임을 할 때 총소리나 상대방의 발소리를 듣고 위치를 파악하는 사운드플레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각 개별 개체가 소리에 대해 인지한 후의 단계는 다른 개체와의 소통 단계일 것이다. 구성원 A는 구성원 B에게 뒷산에서 곰 소리를 들었음을 전하고자 한다. 이때 가장 원초적인 방법은 모사이다. 최대한 본인이 들은 소리와 유사한 소리를 내서 A는 B에게 곰 소리를 전하고자 할 것이고, 이를 들은 B는 단순히 이상한 소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전에 들었던 곰 소리를 떠올리며 A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위의 단계가 반복되다 보면 이 미완의 소통은 '언어'라는 형태로 자리 잡게 될 것이며, 점점 더 많은 정보를 담아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위와 비슷한 과정으로, 시각 정보는 그림과 상형문자를 거쳐 표의, 표음 문자로 발전하게 될 것이고 글과 언어를 통해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보량의 이동이 발생했을 것이다.


2. 단순한 소리가 아닌 음악은 어땠을까


위 과정을 통해 소리가 언어로 변모했다면, 노래와 음악은 어떠했을까? 노래와 음악도 그 시작점은 모호할지라도 그 형태가 갖춰지고 난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전은 정보를 완벽하게 전달하기 쉽지 않다. Receiver(인간의 청력과 이해력)와 Speaker(인간의 성대 활용 능력과 기억력)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후 등장하게 된 것이 '악보'라는 일종의 설계도이지 않았을지 싶다. (역사상 전후관계는 알지 못하여 우선은 논리 상 순서를 나열해 보았다.) 음의 높이, 박자, 사용되는 악기, 가사 등 악보는 음악이라는 존재의 설계도면 같은 역할을 하며, 실제로 그 음악이 구전되지 않더라도 악보의 전달을 통해 음악이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음악의 간접적인 전달 이후의 방식이 바로 녹음을 통한 보다 직접적인(여전히 간접적이기는 하나 악보보다는 직접적인) 방식이었을 것이다. 원래라면 일순간 진동 후 사라졌어야 할 소리의 파동이 기록되어 다시 재생될 수 있게 된 것은 초기에는 가히 혁명적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충격을 그림→사진→영상 단계에서도 느꼈을 것이다.)


덧 1. 잠시 큰 줄기에서 벗어난, 인지에 대한 이야기


위와 같은 소리의 재현의 개념으로 LP를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생겨났다. 우리가 가수의 음악을 직접 귀로 듣는 것과 녹음하여 스피커로 듣는 것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물론 기계적 한계에 의한 해상력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론상 완벽한 녹음장치와 스피커가 있다면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해낼 수 있을까? 아니,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결국 소리를 인지하는 것은 음파의 진동 이외에도 외적 환경 (우리가 가수를 시각이나 다른 요소들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고 인지하고 있는 것)까지 고려되어야 완결되는 것이 아닐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3. 이제야 시작해보는 LP 이야기


이런저런 근원적인 생각을 하고 나서야 LP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LP는 Long Playing Record(재생시간에 따른 명칭), Vinyl Record(재질에 의한 명칭)를 말한다. 플라스틱 재질의 판에 소릿골(Groove)을 새겨 넣는, 일종의 지진계 방식이자 나선형의 아날로그 타임라인인 셈이다.


이 물리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이 예전에는 가장 최신의 기술이었겠으나, 물론 지금은 음원을 디지털화하는 것이 원본에 훨씬 가깝게 보관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이 직관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이 가진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디지털화된 사진기를 두고 필름에 빛을 직접 가해 상을 남기는 필름 카메라를 찾는 심리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Carve, Engrave, Incise. 무언가를 새긴다는 의미는 정보전달의 목적뿐만 아니라 더 강한 기록이라는 심리적 느낌을 준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기록을 남길 때, 쓴다고 하는 것과 새긴다고 하는 것의 어감 차이는 꽤나 크다. 새긴다는 말은 다시는 지워지지 않게 하고자 강하게 남긴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돌에 글자를 새겨 넣는 비석은 마음속 깊이 새겨 넣고 물리적으로도 더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새겨 넣고자 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LP와 필름은 그 순간을 물리적으로 플라스틱 판과 필름에 새겨 넣고 고정해 낸다. 실제로는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그 안에 가둬내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물리적 방식의 강한 메시지이기에 21세기의 진일보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덧 2. 다시 다른 길로 빠져서. 우리의 인생은 디지털인가 아날로그인가


LP와 디지털 음원, 필름과 사진 파일을 비교해보면 LP와 필름은 아날로그, 디지털 음원과 사진 파일은 디지털의 느낌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중 무엇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매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이어지기 때문에 아날로그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우리가 인지할 수조차 없는 짧은 간격으로 우리 존재가 사라지고 생겨나더라도 우리는 이를 디지털로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결된 그림을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와 미래뿐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순간은 과거가 되며, 오지 않은 순간은 아직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 인생이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요소도 있지 않을지 싶지만, 그렇게 따지면 LP나 필름도 최소단위로 분리시키면 디지털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인지의 해상도를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정될 문제 같기도 하다.


실제로 인체의 전체 세포가 교체되는 주기가 약 80일 정도라고 하니, 인간 자체가 80일 주기의 테세우스의 배가 되는 셈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 몸은 1초에 380만 개의 세포를 교체한다

(한겨레, 2021년 1월 27일, 곽노필 기자)


4. 그래도 LP의 그 느낌이 좋다


흔히들 말하는 '화이트 노이즈(백색 소음)', '하얀 거짓말'같은 단어들은 긍정적 접두어 + 부정적 단어의 형태를 띤다. 본질적으로는 부정적 단어이지만 앞에 긍정적인 단어가 붙게 되면서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냉정하게 보면 LP는 기술적으로는 Outdated 된 지 오래다. 이미 CD와 디지털 음원이 LP를 음원 및 활용성, 보관 및 유지 측면에서 훨씬 상회한다. 또한 LP는 물질적으로도 내구도 한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왜곡과 노이즈, 살짝은 부족할 수 있는 음질이 LP의 매력을 배가시켜주는 조미료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발효와 부패는 생물학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지라도 효용성 측면에서는 하늘과 땅차이다. LP는 그 당시의 추억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데 모여 잘 발효된 음악 저장소가 되지 않았는지 조심스레 사견을 남기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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