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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리 Sep 20. 2022

미완성인 사람들의 모임일 뿐

가족을 미워해도 괜찮을까요?

  '가족’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익숙하고 지루한 소재가 되어 버렸다. 그만큼 개개인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삶에서 너무나 당연한 공간을 차지한다. 삶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꼭 긍정적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누군가에게 가족은 또 다른 자아이자 인생에 다시없을 선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넘어야 할 산, 만나지 말았어야 할 원수, 입에도 담기 싫은 존재일 수 있다. 아니면 그 중간 어딘가 즈음, 애매한 존재여서 무어라 표현하기 머쓱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 맺어진 부부의 연을 제외하면, 가족은 내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거나 선택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맺어진다는 점에서 이 세상 다른 어떤 관계들보다 특별하다. 바로 이 점이 가족이라는 존재를 가장 소중하게 하기도, 끔찍하게 하기도 한다.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마주 보아야 하는.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유전적으로 묶여있는 존재들이다.


  상담을 찾는 많은 *내담자들도 이 떨어뜨릴 수 없는 가족과의 관계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억압과 상처로 인해 마음 아파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 형제자매들과의 다툼으로 인해 마음 한편에 깊은 흉터가 생긴 이들, 그 외 수많은 가족 갈등 주제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런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해서 가족을 바꿀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가족 문제를 주소로 내방하는 내담자들은 초보인 나에게 특히 어렵다. 나를 정말 많이 공부하게 하는, 소중한 내담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족 문제’라는 큰 범위 안에서의 다양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흔히 나타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 매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을 충분히 돌보아 주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했던 친구가, 며칠이 지난 후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며 부모님을 변호하는 일은 드문 것이 아니다. 가족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직장 동료에게 공감을 하는 모습을 보였더니, 자신의 가족을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여 뜬금없는 해명을 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엄마와의 다툼을 토로했을 때 친구 입에서 나오는 ‘어머님이 너무 하셨다.’라는 소리가 그렇게 쓰라릴 수 없다.


  소중한 내 가족을 남들이 안 좋게 생각하는 것을 즐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선 이상의 험담이나 파괴적인 감정은 제지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차원이 아닌, ‘가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야.’라는 당위이자  비합리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원인을 논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다. 효를 강조하는 한국의 유교 문화, 상처 준 이에게 원망을 던지기 어려운 착한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만이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둥지라는 생각 등.


  가족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당위가 단순한 가족애로 끝난다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괴롭지 않다면, 미워하지 않는 쪽이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가족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방향은 비합리적 신념에 의해 뒤틀려 버린다. 이는 자책이라는 감정으로 변질되어 나에게로 향한다. 강하게 미워하면 할수록 자책은 나를 더욱 크게 상처 입힌다.


  내 마음에 강렬히 자리 잡은 죄책감은 가족으로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자유를 차단한다. ‘가족은 소중하므로 서로에게 좋은 감정만을 느껴야 해. 피가 섞인 가족 간의 나쁜 감정은 글자 그대로 나쁜 것이야’이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나는 ‘나쁜 마음’에게 자꾸만 ‘그러지 말자.’고 타이른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맘대로 되던가. 억압된 감정은 물이 끓는 냄비에 뚜껑을 닫아버린 것처럼 언젠가 넘쳐흐른다. 넘쳐흐른 뜨거운 물은 자책이라는 이름으로 내 마음에 화상을 입히게 된다.


  결정적인 모순은 여기에 있다. 가족에게 나쁜 마음을 먹지 않으려면, 오히려 가족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중한 대상과의 관계가 기능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게 느껴지는 감정을 오롯이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상담 이론에서도, 관계의 일반론에서도 가장 근본적이고 확실한 진리이다. 물이 끓고 있다면 뚜껑을 덮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은 어떨까. 뜨겁고 위험해 보이겠지만 적어도 넘쳐흐르는 물에 화상을 입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의 부모가 원망스럽고, 못나 보이고, 당신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내 형제자매가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져도 상관없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 완벽한 관계는 어차피 없으니까. 당신의 가족도 평생 미완성인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모임일 뿐이다. 때로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내가 온전히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분명히 훼방꾼일 뿐인 가족 구성원도 존재한다. 그 구성원과의 관계에 대한 결정 또한 온전히 내 몫이다. 누가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스스로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가 아닌 온전한 ‘나’로 바라봐주는 것이 좋겠다. 엄마는 대부분 내 편을 잘 들어주시지만,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를 별난 아이로 몰아가곤 한다. 그럴 때 나는 엄마한테 짜증이 난다. 엄마는 고리타분하고 때때로 이해심이 부족한 사람이다(엄마 미안해요.). 많은 시간 엄마의 사랑을 받는 ‘딸’ 주리가 이런 생각을 하면 괜히 불효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절실한 상황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외면당하는 불쌍한 ‘주리’는 충분히 그런 감정을 느낄만하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그런 감정이 들었다면, 그럴만한 일일 것이다.


  어차피 모든 관계는 얽히고설키고, 단순한 듯 복잡하다. 가족 관계가 성역일 순 없다. 풀어보려고 애쓰지 말자.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정리해 보고자 시도하지 말자. 그냥 복작대며 엉켜 있는 감정들을 가만히 바라보자. 엉켜있는 모양 속에서 의외의 규칙과 질서를 발견할 수도 있고, 때로는 끈덕지게 엉겨 붙은 그 상태가 나쁘지만은 않은 거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 관계를 싹둑 잘라 버리는 것만이 정답이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족도 처음에는 초면이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관계의 연속선 안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의 초면을 마주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내 가족은 서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가장 ‘초보’이다. 갈등 상황에서 다양한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은 초보의 당연한 덕목(?)이므로 좀 더 편안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노력해봤자, 어차피 평생 능숙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 내담자들에 관련된 언급은 직·간접적으로 보고 겪은 사례를 최대한 뭉뚱그리고, 각색하여 포괄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누군지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들, 상담 윤리에 위배되는 정보들은 절대 포함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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