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인생만큼 그 자체로서 모순을 지니는 대상이 있을까.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인생은 누군가에게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강물처럼 순리대로 살아가는 방법 그 자체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무게에 짓눌려 죽을 만큼의 무거운 존재이기도 하다.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며 자신의 신념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는 자들도 있지만, 본인의 삶에 대해 늘 의심으로 가득 차 방황하며 부끄러워하는 이들도 있다. 애초에 본인의 삶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인생만을 관심사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의 인생은 가벼움과 무거움, 확신과 의심, 이들을 천칭에 대고 저울질할 때 어디로 기울어지는 것일까.
34년. 90년 10월에 태어나 작은 시골학교에서 수재 소리를 들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명문대 공대로 입학하였으며 학사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하였다. 적어놓고 보니 참으로 깔끔한 인생이다. 잘 정리된 인과관계로 인해 파악하기 쉽다. 공부했다. 명문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올바른 인과관계이다. 멀리서 본 내 삶은 현재까지도 그 깔끔한 인과관계를 이어가고 있으며 보편적인 행복을 포함하고 있다. 반대로 가까이서 본다면, 나 역시 앞선 명제와도 같은 비극의 형태를 띤 삶을 마땅히 살고 있는 것일까. 또, 비극의 형태를 마주할 용기가 있을까. 해보지 않은 것들이기에 방법도 모르며 올바른 마음가짐이란 것도 알 수 없다.
어릴 적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기억력이 안 좋은 것일 수도 있고 특별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심 나는 그날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에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나의 결핍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그 옛날 시골에서 육 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듣기로는 할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때부터 장남과 가장이란 책임감을 어깨에 지고 살아온 분이시다. 그렇게 책임감이 강하셨던 아버지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내가 8~9살 때 즈음 이혼을 하셨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두 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는 것 은 기억한다. 생각하건대, 친어머니는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내 위로 누나가 두 명 있는데 아들을 낳지 못했던 것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셨을까 싶다. 평범하게 동네 아주머니들과 같이 수다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재밌어하셨던 것 같다. 그런 분에게 무뚝뚝한 아버지는 대화 상대로 기댈 수는 없었을 것이다. 90년대의 일반적인 가정의 형태였으며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불행을 품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두 분은 이혼을 하셨고 그 가정의 형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요즘 이혼은 일반적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매우 터부시 되던 것이었다. 학교에 가면 종종 엄마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받기도 했다. 신기한 것이, 그 몇 마디도 되지 않던 말들은 아직도 끝끝내 기억이 난다. 또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와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어머니는 마지막 날 짐을 싸고 집을 떠났는데, 나는 그때만 해도 이혼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으며 그저 어머니가 떠난다 하는 말들이 섭섭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를 쳐다보지 않고 내가 모으던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이후에 한번 정도는 따로 만난 것 같지만 그 후로의 연락은 끊겼고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10살 때 즈음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는 업무로 인한 귀가 시간이 늦었고 당직을 서야 할 때도 많았다. 수직적인 문화로 유명한 공무원 경찰 조직 사회 안에서 자식 셋을 혼자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새어머니이자 지금의 어머니이신 분은 가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다. 감정의 기복이 커 툭하면 화를 내셨다. 본인에 대한 방어 기제가 매우 강하여 항상 말조심하고 기분을 살펴야 했다. 어느 단어에서 화를 내실지 몰랐다. 표독스럽게 화를 내셨고 기댈 수 없었다. 홀로 시집을 오셔서 이런저런 불안함과 고민들이 많으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딸린 자식은 없고 남의 자식만 셋이다. 아마 우리는 자식이라는 느낌보다 넘어야 할 산과도 같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진정한 의미로써 조건 없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진 못했다.
새어머니의 존재는 누나들과 갈등을 유발했다. 나와의 터울이 각각 3살, 5살로 모두 사춘기시절이었다. 집은 늘 신경전으로 인한 긴장감이 있었고, 언성이 높아지는 날도 다분했다. 하루는 큰 누나와 어머니가 크게 싸워 큰 누나의 얼굴을 어머니가 손톱으로 긁은 날이 있었다. 누나는 그날로 할머니 집으로 갔고 이후 며칠 간 할머니 집에서 통학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저 말없이 이 날들이 지나가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두 번씩이나 이혼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날이 기점이 되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어머니와 누나들과의 관계는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나들은 대학생이 되자 독립하여 집을 나갔고 같이 살아갔다. 그리고 새어머니를 본인들의 마음속에서 배제하였다.
나는 원래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고 오락실을 좋아했다. 특히 물건을 잘 잃어버렸는데 그중에서도 우산과 열쇠를 많이 잃어버렸다. 조그마한 사고뭉치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던 것 같다. 성적 우수 표창을 받았고 집에서는 나에게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새어머니의 욕심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집안에서 장손의 공부 성적을 올릴 수 있다면, 본인의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시골 학교에서의 전교 1등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늘 지금의 내 삶의 안정은 과거 열심히 했던 그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기에 새어머니에 대해 감사해하라고 하셨다. 이 역시 멀리서 본다면 감사해 마땅한 일이겠지만, 내심은 그렇지 못했다.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고마움보다는 공허함, 불안함, 굴욕감, 꺼림칙한 종속감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을 거치고 서울대 진학에 성공하였다. 대한민국 입시 경쟁 시스템 안에서의 큰 성공으로 남 부럽지 않은 결과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형태를 띠고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방종이었으며 반항과도 같았다. 이른바 사춘기가 그때 시작됐다고 하면 너무 때늦은 것일까.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사춘기의 일종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대학생의 나는 집안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굳이 숨기지 않았으니 겉으로 보더라도 명확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친근한 접근과 관계개선의 요구사항들은 의아함과 반항심을 불러왔고 새로 접한 세계는 그야말로 너무 넓었다. 대인관계에 대한 요령도 적었고 다채로운 감정들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실수의 연속이었다.
한 때 군대에서의 고생과 보초를 설 때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한 사색들은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줬다고 굳게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전역 후 돌아온 현실은 여전하였고 과거의 나는 잔상처럼 남아서 내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을 미처 몰랐다. 그저 자신이 익숙한 장소,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언제든 되살아나는 듯했다. 아마도 나는 자기혐오가 매우 강했던 것 같다. 나를 있는 그대로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나란 개념은 '키 작고 왜소한, 크게 이룬 것도 없는 작은 공부의 성과'이다. 뭐 하나 봐줄 게 없는 초라한 인간이었다. 남을 믿지 못했고 주변인들은 늘 나를 험담할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꺼리며 본심을 나타내는 것을 매우 숨기고자 했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봐줄 만한가. 모르겠다. 무색해졌다. 만족한다는 것일까. 타협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는 글러먹은 놈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아버려서일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 든 간에 빛바래졌다. 남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돈이 중요했다. 부동산이 중요하고 당장의 목돈을 만들어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했다. 자본주의 속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참된 것들을 고민거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천재가 아니다. 뇌의 용량은 한계가 있었고, 자본주의 고민들은 이전의 스스로에 대한 사색이나 세상의 호기심과 같은 정량화하기 어렵고 답도 없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몰아내었다. 말투, 행동도 이러한 변화에 동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