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안녕, 스물다섯
[독립출판]
안녕, 스물다섯
저자 : 남도연, 오영석
I like it. I'm twenty-five
지금 나이 스물넷, 스물다섯까지 4개월 남짓을 남겨두고서 이 책을 다시 찾았다.
스물다섯이 되면 아이유의 팔레트 가사처럼, '나를 좀 알 것 같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늘어만 가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안녕하지 못한 나날들을 보냈다는 작가의 서문이 있다.
일회독을 했던 책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내가 '스물다섯'에 가까워지니 다가오는 정도가 다르다. 내가 딱 '불어나는 생각들' 때문에 안녕하지 못한 나날들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생각들은 주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여태껏 좋아하는 일을 하며 후회 없이 살아왔고, 좋았든 나빴든 나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세상의 잣대에 나를 재단해보니 여전히 작기만 한 내 모습이었다. 누구는 대기업에 취업했고, 누구는 대학원에 합격했다는데.. 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내가 귀하게 쌓아올린 것들이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졌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모래사장을 바라보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거야.'하는 고집만 남아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도대체 뭘 좋아하지?' 하는 해결하지 못한 질문도 고스란히 옆에 둔 채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금까지도 명언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그만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설정된 존재이지 않을까. 무언가 불편하거나 불만족스러워서 바꾸고 싶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언젠가 친구가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같은 고민들에 명확한 답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거라 예상해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나를 다 알 수 없고, 나도 다른 사람을 다 알 수 없듯, 내 안에도 내가 다 알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사람은 수많은 면으로 둘러싸인 다면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하나의 형용사로만 설명할 수 없듯이, 다채로운 색깔의 다채로운 면을 갖고 있기에 거울이 있다고 한들 그 모든 면을 비추어줄 수 있을까 싶다. (엄청 커다란 거울방에 들어가서 모든 면을 볼 수 있게 되더라도, 그걸 하나로 통합해서 재단하는 것은 엄청 힘들 것이다. 재단하는 순간 전부를 담을 수 없기도 하고) 그렇다면 '나의 모든 모습을 고려한 완전체 나'라는 정답을 찾는 것도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대신, 내가 어떤 색깔의 어떤 면들이 있는지 많은 경험과 생각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알아가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철학에 '제1명제 (공리)'라는 개념이 있다. 모든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제1명제인데, 연역 논리 구조상 특이한 점이 있다. 제1명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정당화하는 자리에 있지만, 다른 것에 의존해서 직접적으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존하면 기본이 흔들리고 그 이후의 모든 논의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1명제를 정당화하려 시도했다. 직접적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면, 그것이 참인지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증명한 것이다. 가장 강력한 회의의 조건을 설정하고 그 회의의 조건에서도 살아남는 문장이 있다면 그 문장은 더 이상 의심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정당화된 제1명제가 바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이다. 본질적 특성 탓에,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여 제1명제를 정당화한 것이 핵심이다. (데카르트의 아주 위대한 점이지만 동시에 비판받는 부분도 있는데, 본고에서 설명하기에는 주제가 달라져서 이만 줄이려 한다.)
* 관련한 내용이 더 궁금하다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대해 작성한 글이 있으니 참고!
데카르트의 새로운 접근법을 빌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애초에 직접적으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 없다면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나를 비추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간접 거울은 모든 '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대화하며, 그들이 만들어낸 책, 영화, 음악 등을 향유한다. 분명 내가 겪은 이야기는 아닌데 '그 느낌 뭔지 알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타자가 나를 비추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한 경험은 그 사람의 것이다. 나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것(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을 꺼내어 보이고, 그로 인해 순간적으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고 교류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간접적으로나마 우리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스물과 서른 사이의 정 가운데서, 돌아갈 길과 나아갈 길 모두 까마득한 상황에서, 마냥 어리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성숙하지도 못한 지금, 흔들리고 방황하고 있는 그들의 생각을 책 속에 담았습니다. (...) 단지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스물다섯들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이 책을 읽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위로이자 격려가 돼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는 이 모두에게 하나의 진단서가 됐으면 합니다. -작가의 서문 중에서-
그러한 의미에서 <안녕, 스물다섯>은 기획의도대로 '하나의 진단서'이자 '간접 거울'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돌이켜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이 나누는 고민과 질문에 나도 함께하게 된다. 혼자서 나를 찾는 것보다는 서로에게 기대가며 각자의 모습을 찾아가는 게 덜 외롭지 않을까 싶다. 작가가 동갑내기 친구들과의 대화로부터 얻은 위로를 글과 사진을 통해 또 다른 독자들에게 나누어준 덕분에 우리는 연결되어간다.
+++
클라우드 펀딩으로 직접 구매한 독립출판, <안녕, 스물다섯>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