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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의 벚꽃엔딩[2]

내 생애 최고의 시간

by 패셔니스타

25년 전 약속

설 연휴에 친정 부모님을 뵈었다. 어디 한 군데 안 아픈 곳이 없다시면서도 딸네 가족의 반가운 행차에 푸짐한 저녁상을 차려놓고 환하게 웃는 두 분을 마주하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의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만 해도 동생네와 가까운 펜션을 빌려 자주 나들이를 다녔다. 엄마는 무릎 수술 후 오히려 허리까지 통증이 올라 고생하셨다. 그런 엄마를 모시고 다니기 쉽지 않다는 핑계, 주말에도 일한다는 핑계, 아이들 학원 핑계로 여행은커녕 지척에 사시는 부모님을 자주 뵈러 가지도 못했다.


동생네가 시댁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아홉 식구가 모두 모였다. 올해 대학생이 된 딸과 조카, 고등학생이 될 작은 조카까지 장정들이 그득한 친정에서 우리는 옛날을 추억하며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 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겨우 며칠 신혼여행 다녀왔을 뿐인데 우리 집은 갑자기 친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나는 ‘친정’이라는 단어가 주는 서먹함과 생경함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 딸 지금 어디고?”


야근하고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서둘러 가는 길,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집에 가는데.”


“아, 우리 집에 온다고?”


“아니, 우리 집에 간다고.”


엄마의 ‘우리 집’과 나의 ‘우리 집’이 달라졌다. 갑작스러운 의미 분리는 생각지 못한 심리적 혼란을 일으켰다. 그제야 나는 엄마의 ‘우리 집’을 친정으로, 나의 ‘우리 집’을 신혼집으로 불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말은 이제 친정은 우리 집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남의 집 식구가 되어 버린 듯한 서운함은 결혼 생활 내내 지속되었다.


예전에는 한 이불 덮고 자며 아웅다웅 다퉜지만, 지금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동생도 오랜만에 만났다. 반갑게 동생의 안부를 묻던 중 동생네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일본 여행 다녀온 걸 알게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계시는 동생의 시어머니도 고질병인 허리 통증과 무릎 통증을 앓고 계셨다.


“일본은 교통편이 불편해서 많이 걸어야 한다던데 괜찮았어?”


“응, 가는 곳마다 제일 먼저 카페를 물색했어. 걷는 구간이 많을 때 어머님 아버님은 카페에서 잠깐 기다리시고 우리는 구경 다녀왔지. 그래도 너무 좋아하시더라.”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부모님과 예전처럼 이동을 많이 해야 하는 장거리 여행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우리도 엄마 아빠 모시고 올해는 어디든 꼭 다녀오자.”


동생과 나는 아빠 생신인 3월 말로 일정을 잡고 여행지를 물색했다. 대구에서 40분이면 갈 수 있는 제주도가 가장 적합해 보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왕복 비행 편을 예매했다. 성산, 중문, 애월에 평이 좋고 안락해 보이는 숙소도 세 군데 잡았다. 엄마, 아빠, 동생과 나. 아이와 남편을 제외한 서 씨 집안사람들끼리의 일탈인 셈이다. 사위들이 못 가서 어쩌냐면서도 살짝 흥분한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서 씨들의 마지막 여행은 대학교 1학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항을 지나 동해 해안로를 끼고 한참을 달려 영덕에 도착했다. 우리는 조그마한 바닷가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장거리 운전으로 지친 아빠와 엄마가 숙소에서 쉬는 동안 동생과 나는 밖으로 나왔다. 너무 들떠서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해변을 마구 뛰어다녔다.


저녁에는 근처 횟집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회를 먹었다. 우리는 생선회를 한 점 먹고는 물컹거리는 식감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젓가락을 도로 놓고 입맛에도 안 맞는 반찬을 집적거리는 우리를 보더니 아빠는 사장님께 부탁해 오징어회를 따로 주문해 주셨다.


곱게 썰린 오징어회를 아삭거리는 상추와 깻잎 위에 매콤한 초고추장을 듬뿍 찍어 꽁꽁 쌌다. 아빠와 나는 소주잔을 들며 큰 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술을 전혀 못 하는 엄마도 기분 좋게 잔을 채우셨다. 중학교 1학년이던 동생은 그날만은 콜라를 마실 수 있었다. 잔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주잔을 들어 입 속에 톡 털어 꿀꺽 삼켰다. 소주의 쓴맛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전 허겁지겁 입이 터지도록 쌈을 집어넣었다. 씹을 때 쫀득쫀득한 오징어의 감칠맛을 만끽했다. 아빠는 딸이 대학 가더니 술친구가 되었다며 껄껄껄 너털웃음 지으셨다.


다음 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숙소를 나섰다. 다음 해도 함께 오자며 우리는 약속했다. 출발하는 차 안에서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영덕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엄마는 식당을 운영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식당 문을 여셨다.


대구로 다시 오겠다던 오빠는 서울 여자와 결혼하여 아예 서울에 정착했다. 우리 자매도 미래의 동반자를 만났다. 예쁜 아이들이 태어났다. 단출했던 다섯 식구는 세월이 흘러 대가족이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가족 여행은 갖가지 이유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큰 산이었던 아빠는 몸집이 자그마한 노인이 되어 아흔을 바라보고 계신다.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많은 일을 하고도 힘이 남아돌던 엄마는 이제 조금만 움직여도 힘에 부치는지 누워 계실 때가 더 많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실 것 같던 부모님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눈사람처럼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시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이번 여행이 엄마 아빠와 우리 자매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동생과 나는 뭔가를 남기고 추억하려 너무 애쓰지 말자고 약속했다. 이번 여행만큼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25년 전 영덕에서의 우리 가족으로 돌아가 많이 웃고 많이 안아 드리고 우리 눈과 마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추억을 가득 담아 놓자고 했다.


설날 주문한 가족 티셔츠가 친정으로 배송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엄마 아빠는 똑같이 입고 제주를 누비게 될 주황색 후드티를 입어 보시고는 마음에 든다며 사진과 문자를 보내오셨다. 아빠는 다 늙어 주황색이 웬 말이냐며 투덜거리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셨다.

나는 대구에 첫눈 오던 그날부터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3월을 아이처럼 손꼽아 기다린다. 하얀 눈만큼이나 아름다울 벚꽃과 함께 우리는 찰나의 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생애 최고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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