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9일
지난 주 은퇴를 보름 앞두신 자료실 사서로부터 화요 콜로키움을 안내하는 메일을 보내셨다. 이 거대한 뮤지엄 연합은 어떤 정보가 자료실로 보내지고, 사서는 그것을 분류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아주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보낸 내용은 작년 스미소니언의 펠로우였던 리옹대학의 Marie Plassart 박사가 리서치 결과인 논문을 스미소니언 식구들과 나누는 자리란다. 주제는 "미국의 내셔널리즘 분석: 1945-1980년 스미소니언의 역사" 인데 오후 시간에 졸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나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작년에 읽은 발레리 줄레조 박사의 [아파트 공화국]를 떠올리며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연구자를 통한 시각이 기대되기도 했고. 그녀는 먼저 내셔널리즘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 시작하면서 1976년 미국의 상황이 가져온 변화, 그리고 공동의 야심, 그것의 재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과정 중에 큐레이터들은 국가적 가치와 보편적 가치를 동시에 만들어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는 아주 강하게 국가적 가치를 표현했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끝나야 하고, 거기에 재정이 지원되는 상황에서 큐레이터들이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며 플라사르 박사는 결국 냉전이 얼마나 스미소니언에서 중요했는지도 덧붙였다. 이 짧은 15분 정도의 요약 발표에 각 박물관에서 온 큐레이터들은 각자 질문을 통해서 그들의 의견을 말했는데 그 의견들이 아주 인상 깊었다. 어떤 큐레이터는 "그래서 내셔널리즘이 우리에게 긍정적이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부정정이었다는 것인지 말해달라"라고 하기도 하고 항공우주박물관의 한 큐레이터는 "항공우주박물관이 만들어진 시기가 바로 그러한 시기였고 그래서 우리는 항공박물관이 아닌 항공"우주"박물관이 되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또한 냉전시기에 이러한 프로젝트에 대한 funny money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갑자기 이 사람들은 어떻게 30년 전의 역사를 이토록 다 알고 있는 것일까 놀랍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랜 연구자이자 박물관의 역사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 내 옆에서 계속 기침을 하면서 먹을 것을 너무 많이 드시고 계셔서 이 분은 도대체 어디서 오신 분일까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었던 - 아주 편안한 아줌마 같은 분이 " 당신의 연구에서 이러한 우리 목소리가 왜 빠져있는가. 우리 모두의 공동적인 증언이라면 당신의 연구가 뮤지엄의 역사를 훑는 것이 아니라 스미소니언의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것" 이라면서 구술사의 부재를 지적한 것이었다. 딱 1시간의 콜로키움이었는데 한 펠로우의 연구를 통해서 모두가 모여서 이런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는 아직 기관의 전문가들이 모이면 이런 논의를 하기에는 전문가의 필요성, 조직, 운영방법 등을 다루기에 바쁜 상황이지만 이런 주제로 대학 교수들이 아닌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이 모여서 의견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현장의 모습과 학술연구의 다리가 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혼자 감동에 겨워 구술사를 제안하신 큐레이터 분의 방에서 가져 온 의자를 함께 들어드리면서 보니 이 분은 미국역사박물관의 가족사 담당 큐레이터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오는데 항공우주박물관과 소련의 관계를 역설하신 큐레이터가 같이 탔는데 다시 한번 감동에 겹다 보니 그의 커멘트가 좋았다고 한 마디 하게 된다. 그 분 왈 "난 사실 캐나다 사람이다. 아마도 캐나다 사람이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시각이 남들과 다른 것 같다" 끊임없이 외부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이라... 갑자기 심수봉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