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렇다
드라마 제목이 무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니.
생뚱맞다 못해 솔직함 쩌는 이 문장은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로 잘 알려진 박해영 작가의 신작 제목이다.
그녀의 오랜 팬으로서 이 신작 소식은 너무 반가운 뉴스가 어닐 수 없다.
그런데 처음 기사에서 이 제목을 접했을 땐 드라마 제목치곤 너무 형이상학적이다 못해 철학서 제목 같아 저으기 당황스러웠더랬다.
이게 드라마 제목이라고?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자세를 고쳐 잡고 박장대소했다.
맞다. 박해영 작가가 아니던가.
드라마 제목에 '해방'이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넣었던 그녀일진대 이 정도 파격이 뭐 대수겠는가.
너무나 그녀다운(나의 해방일지를 시청한 이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제목인 것은 물론
인간의 지성(지능이 아닌)조차 조만간 카피할 것 같은 ASI(초인공지능) 특이점 문턱에서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인류의 허를 찌르는 절묘한 제목이었기에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흠~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고?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고?
와~ 너무 위로가 되는 걸!
4월 방영 예정인 이 드라마는 아직 스틸사진은 물론 트레일러조차 공개되지 않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제목만으로도 드라마 한 편을 다 본 듯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아니 서서히 따스해졌다.
어차피 내가 책을 읽는 목적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이유도 생면부지 작가와 감독이 건네는 위로를, 공감을, 유대를, 연대를 얻기 위함이었으니까.
물론 그 위로와 공감이 때론 너무 뾰족하고 날카로워 긁히고 찢겨 상처투성이가 될 때도 부지기 수였지만.
아마도 내가 이 드라마 제목만으로도 왈칵 울음을 쏟을 뻔 한 건 내 오랜 우문(愚問)에 기인하지 싶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건가?(잘 살고 있다고 말해줘 제발)
이만하면 괜찮은 건가?(이 정도면 괜찮다고 말해줘 제발)
내 존재 가치는 늙고 병들어도 지속가능한가?(지속가능하다고 말해줘 제발)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고도 사회구성원으로서 존재 가치가 있는 건가? (존재가치 충분하다고 말해줘 제발)
물론 알고 있다.
이 내 오랜 우문에 현답은 없다는 걸.
그러나 어쩌랴.
현생인류가 다른 종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늘 실존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사피엔스는 수시로 자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확인받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나 역시 이 우문에
이만하면 꽤 잘 살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하는 디스토피아 시나리오가 펼쳐지지 않는 한
그럭저럭 살아지게 될 것임도 잘 알고 있다.
이런 내 삶에 대한 이 빈약한 긍정은, 이 맥락 없는 수긍은 뭐 대단한 철학이나 깨달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삶의 의미는 세계 바깥에 존재하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 초기 철학을 신봉하기 때문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저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젠장.
그럼에도
불안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현생인류로서 나는
지난 수 십 년간 사르트르와 카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여전히 미래의 실존과 존재 이유 앞에서
어쩔 도리 없이 흔들리는 마음 감출길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상심(平常心)이란 원래부터 고요한 마음이 아닌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도 고요한 것이라 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여전히 내 무가치함과 싸우느라
내 실존 안팎 몹시도 고되고 소란스러우나
아직 평상심에 다다를 수 있는 기회
기필코, 기어이 남아 있으니.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염치불구
즉심즉불(卽心卽佛) 경계 앞을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