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단상
가끔, 아니 자주 이렇게 꾸역꾸역 나이만 먹다 생을 마치게 될까 소름 끼치게 공포스러워질 때가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결코 궁금하지도, 생각할 필요도 없던 화두며 공포다.
이렇게 대책없는 공포가 밀려들 때면 내 존재 이유가 그저 이 하찮은 유전자의 운반체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라는 걸 경전처럼 되뇌어 보지만 내게 남은 이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목도하는 순간이면 어쩔도리 없이 까무룩 망연자실하게 된다.
이는 예고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닌 남은 생에 대한, 그러니까 이렇게 비루하게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비천함이 주는 속절없는 공포다.
이 달랠 길 없는 무지막지한 공포는 새해라는 달력 앞에 서면 더 가속화된다.
1년, 열두 달, 365일을 또다시 달려야 한다니. 내려와야 할 것을 알면서도 언덕 위로 꾸역꾸역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처럼. 이 얼마나 무용하며 이 얼마나 비생산적이란 노동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 삶이란 미스테리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지구 상 모든 사피엔스가 경이롭기만 하다.
내 이 경외심은 비단 현생인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먹이를 나르는, 이제는 제법 내적 친밀감마저 느껴지는 옆집 다람쥐와 아침마다 우리 집 베란다로 출근 도장을 찍는 허밍버드와 가끔 석양 무렵 동네 언덕에 출몰하는 코요테 가족도 내게는 경이롭기 그지없는 생명의 신비이며 더할나위 없는 망극함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은 그리 해맑은 얼굴로 주어진 시간을 그다지도 성실히 살아낼 수 있는 걸까. 어쩌자고 그렇게도 착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우직히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유시민 선생의 혜안처럼 이렇게 꾸역꾸역 살다 보면 나도 또 그렇게 살아지려나.
꾸역꾸역 버티다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