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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칼립투스 May 21. 2020

경력 단절 후 새로 시작하기까지

잃을 것 없는 자의 홀가분함이란

사진 출처: Unsplash


어느 날 갑자기 떠밀리듯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 경력 단절이 내 얘기가 될꺼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16년 동안 매일 출근해서 일을 하고, 결과물을 내고, 부지런히 커리어를 쌓는건 숨을 쉬는것만큼 당연했다. 요즘 종종 신문을 장식하는 "여성 최초" 대기업 임원이나 30대 대변인급 정치인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내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룰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을 뿐. 당시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사내정치 센스', '영업 스킬', '네트워킹' 능력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모두가 술로 친해지고 술로 딜을 하는 바닥에서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 체질은 이내 직장내 왕따로 이어졌다.


사정이 이러니 회사 내에서 이너 서클은 커녕 승진 경쟁에서도 밀려나는게 당연했고, 누구도 퇴사를 종용한 사람은 없었지만, 순식간에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남녀 차별도, 병든 기업문화도 한 몫 했지만, 결과적으로 퇴사는 온전히 내 책임이었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공정하지 못한 세상을, 유독 나만 괴롭히는 상사들을, 육아와 집안일에 무관심한 남편을, 자랑스러운 아들 기 죽이지 말라고 하시던 시어머니를 원망했다. 전업주부도, 취업준비생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1년 가까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명함 없는 나, '어디의 누구' 가 아닌, 그냥 OOO 로 불리우는 내가 초라했다. 무방비로 "무슨 일 하시나요?"라는 질문이 날아들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허접한 일처리를 나무라며 찬바람 쌩쌩 불던 패기는 저 멀리 옛날 옛적 일로 보낸지 오래였다.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하는 일은 없고, 그냥 "백수예요" 라고 자연스레 답하게 될때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를 쥐어 뜯으며, 나한테 정말 중요한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잘난 척 하고 재수없긴 해도 두뇌회전 만큼은 나무랄 데 없는 옛 동료들 틈으로 다시 비집고 들어갈지, 순박하지만 예전만큼 똘똘한 사람들은 적은 조직에서 뱀의 머리 행세를 해볼지,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을 얻는 대신 직장인의 자존심, 즉 연봉을 과감하게 포기할지. 무엇 하나 쉬운 선택지가 없었다.


퇴사 한 달 전쯤 공들여 수정해둔 이력서가 걸레가 되어 인터넷을 아무렇게나 떠돌아다니고, 헤드헌터라는 사람이 오랜만에 연락을 해서는, 경력을 10년 정도 날리고 하향지원해서 일단 면접이라도 보라고, 대체 언제까지 손 놓고 놀고만 있을꺼냐며 은근히 자존심을 긁는 일이 잦아졌다. 퇴사하고 반년도 지나지 않아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는 것조차 버거울만큼 무기력해져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멘탈을, 일처리 만큼은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자부심을, 땅에 떨어져 팽겨쳐진 자존감을, 한톨한톨 다시 주워 담아야 했다. 사소한 면접을 앞두고도 미팅 장소로 가는 길 복도에서 숨이 막혀 가다 서다를 몇 번이고 반복해야 했고, 다시 누군가 앞에서 내 의견을 개진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팀을 리드하는건 감히 꿈꿀 수조차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때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해준건, '잃을 것이 없다'는 자각이었다. 지킬 명예도, 내세울 네트워크도, 인정받을 성과도 없는 대신, 무슨 삽질을 해도, 어떤 실패를 해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나에겐 1년 정도 돈을 벌지 못해도 먹고 살만큼의 경제적 자유가 있었다. 어렵게 얻은 면접자리에서 헛다리를 짚어도 생계를 위협받지 않았고, 프리랜스 컨설팅 프로젝트를 맡아놓고 데드라인을 한번쯤 놓쳐도 미친 듯이 공격하는 상사가 없었다. 내일이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호들갑 떠는 클라이언트도 없었으며, 첫 폭탄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동시에 형동생을 트는 아재들 틈새에서 불편하고 껄끄러운 존재가 될까 걱정할 필요도, 이런 나를 사뿐히 즈려밟고 발판삼아 출세하려는 동료도 없었다. 하기 싫은 아부를 못한다고 가차 없이 팽 당할까 두려워하는 대신, 할말 똑바로 하고도 결과물만 잘 내면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내가 찾은 곳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회사. 업력은 30년도 넘었지만 조직도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었다. 출퇴근시간의 자유를 얻는 대신 연봉을 가차 없이 후려치고, 인내심 많은 상사와 뒷통수 칠 걱정 없는 순진한 동료들이 있는 곳. 최소한 내가 일하는 상대방들하고는 사내 정치가 아예 필요없는 곳. 그것도 처음엔 컨설팅 계약을 맺고 고문처럼 6개월동안 얕게, 점점 관여하는 업무의 범위를 넓혀가면서 충분히 알아가는 시간을 거친 후 정착했다.


약점을 보완해서 둥글둥글 원만한 회사원이 될 수 있을꺼란 희망은 개나 줘버리고는,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실천했다. 회사 입장에서도 내가 못하는 것, 사람들을 아우르고 영업선을 개척하며 조직 내 리더십을 발휘하는,에 대한 기대는 없다.  아랫사람들에게는 정석대로 일을 가르쳐주고, 윗사람들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면서 대쪽같이, 혹은 장렬하게 기어이 할말은 하고야 마는, 내 성격 그대로 살 수 있는 지금 포지션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지금 있는 조직이 종착점이 될 것이냐 하면,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 같다. 아마도 내 커리어를 마치기 전, 말이 잘 통하고 눈높이가 맞는 사람들을 찾아 한 두번은 더 이직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난, 이전 직장에서 탈탈 털린 영혼을 이제 반쯤 회수했을 뿐,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인 셈이다. 그럼에도 요즘은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걸 더 이상 강요받지 않고,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인생을 희생하는 대신, 아들의 어린 시절을 엄마로서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한테 인정받는 것이 목표가 아닌, 그저 어디에서든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직장인으로서 내 목표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내고, 대신 걱정되거나 의심이 드는건 정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차 없이 이야기하며, 한 걸음씩, 나 다움을 지켜내며 앞으로의 커리어를, 가야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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