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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비행기에서의 13시간

by 미스블루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까지는 비행기로 12시간 45분이 걸린다.

엄청난 시간이다.

12시간이 넘어가다니 말이다.

꼿꼿이 앉아서 지내야 하는 12시간 45분이라는 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낼까?

깊은 심호흡과 함께 가장 잘 버틸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이 꼭 필요하다.

일단 옆자리에 누가 앉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자리에 앉은 후 비행기 안으로 차례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간절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제발… 편안한 사람과 함께 가게 되기를 두 손 모아 희망한다.

대박이다.

비행기에 탑승한 사람을 통틀어 아프리칸 아메리칸 남자는 딱 두 사람.

그 둘이 딱 내 옆에 앉았다. ^^

아 하하하하

인종차별적 발언은 아니고 그냥 한국 여자분이었으면 하고 바랬었다.

어쩔 수 없다.

그래요. 함께 갑시다.

마음을 먹었다.

탑승 후 조금 기다리니 이륙을 위해 비행기는 전속력을 다해 달린다.

마치 체육시간에 멀리뛰기를 하기 위해 저 멀리서부터 있는 힘을 다해 달렸던 우리들 같다.

아침부터 비행기를 타야 하는 스케줄로 인한 긴장감이 풀리며 나는 잠깐 잠이 든다.

후각이 자극이 되며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니 스르륵 잠이 깬다.

승무원들은 벌써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 어여쁜 승무원들의 얼굴을 보면 요즘 한국에 유행하는 화장이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다.

스카프를 반듯이 매고 직업적 미소를 장착한 그들이 빛나게 예쁘다.

다정하게 다가와 연어비빔밥과 비프스튜 어쩌고 와 카레라이스 세 가지 메뉴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

연어 비빔밥을 골랐더니 옆에 아저씨도 같은 것을 고른다.

동그란 볼에 훈제 연어와 야채가 담겨있고 반찬으로는 오이지무침 그리고 된장국과 햇반이 나온다.

소스는 초고추장이다. 그리고 참기름 팩이 있다.

후식으로는 약과와 오렌지다.

햇반을 볼에 넣고 초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뒤적이고 있다가 옆의 아저씨를 흘끔 보니 오이지까지 몽땅 털어 넣고 초고추장도 다 넣고 열심히 비비고 있는데 참기름을 안 넣는 것이다.

작은 쟁반 반찬그릇 밑에 깔려 있는 참기름 팩을 못 본 모양이다.

아…. 말해주고 싶다. 정말 말해 주고 싶다. 아.....

참기름을 넣어야 비빔밥에서 윤기가 나면서 초고추장과 어우러져 진짜 비빔밥의 맛이 나는 건데..

오지랖 미스블루는 더 이상 참지 못한다.

아저씨의 쟁반으로 슬금슬금 손이 가더니 참기름을 가리키며 이것도 넣으면 맛있어라고 결국 말하고 말았다.

그 소리를 듣더니 아저씨는 나를 보고 환하게.. 정말 환하게 웃으며 그 큰손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참기름 팩을 최선을 다해 짜낸다.

아저씨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그 순간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내가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밥을 먹으며 꼭 보는 영화가 있다.

신기한 일은 이 영화는 없어지지 않고 몇 년째 비행기 안의 플레이 리스트에 꼭 있다는 것이다.

바로 ‘리틀 포레스트’ 다.

일본영화를 한국판으로 만든 건데 도시생활에 지친 여주인공이 어릴 적 자신이 살던 시골집으로 돌아와 집 밥을 해 먹으며 에너지를 다시 얻어 도시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엄마도 떠나고 없는 빈 시골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바쁜 도시생활로 인해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다가 시골에서 매일매일 해 먹는 소박한 집밥으로 인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

추운 겨울날 냄비에 지은 윤기 나는 쌀밥과 눈 밑에서 캐낸 봄동으로 된장국을 끓여 허겁지겁 먹는 모습.

밀가루 반죽을 숙성시켜 김치 수제비를 만들어 눈을 치우고 난 후 꽁꽁 언 몸을 녹이며 먹는 모습

색색의 고운 야채물로 켜켜이 얹어 만들어낸 김 나는 무지개 시루떡을 포크로 케이크 자르듯 잘라먹는 모습.

이 영화를 보며 드라이한 기내식을 먹으면 기내식을 꿀맛으로 먹을 수 있다.

연어 비빔밥을 먹고 난 후 홍차와 달디단 약과를 야무지게 먹었다.

기내식을 먹고 영화 ‘파묘’를 보다가 잠이 들고 또 깨서 조금 본 후 자기를 반복하다 보니 7시간 남았다고 한다.

앗 싸! 반은 지났다.

이제 남은 7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낼 것인가.

테이블을 내리고 가져온 노트북을 열어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대각선에 앉은 사람이 뒤에서 읽고 있을 까봐 글자 크기를 줄인다. (아무도 너 안 쳐다본단다. 쯧쯧…)

조금 후 깜깜한 기내에 승무원이 작은 움직임으로 돌아다니며 간식으로 피자 토스트를 주어 오렌지 주스와 함께 먹었다.

갑작스러운 기류변동으로 인하여 비행기가 흔들려서 글을 쓰자니 어지러움이 인다.

냉큼 노트북을 닫는다.

글이고 뭐고 여행중일 때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4시간 정도 남았다.

지루하고 지루하고 온몸이 쑤신다.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앞에 할아버지는 화면도 꺼놓고 그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가는 사람들의 경우 아내는 남편에게 다리를 척 올려놓는다. 부럽다.

모두들 말없이 견디고 있음이 팽팽하게 느껴진다.

가져온 책을 꺼내 읽으려고 독서등을 켜니 너무 밝아서 자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껐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잠깐 눈을 감고 있는다.

2시간 남았다.

마지막 식사 시간이 되어 또다시 예쁜 승무원언니들이 돌아다니며 식사를 해야 하니 등받이를 세워 앉으라고 한다.

우리 모두 말을 참 잘 듣는다.

닭고기 파스타와 닭고기 없는 파스타 중 고르라고 해서 없는 쪽을 골랐다.

식사가 나왔고 너무 피곤해서 인지 입맛이 없어 조금 끼적대가다 그만두고 뜨거운 홍차 한잔만 마신다.

1시간 남았다.

모두들 곧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비행기 안에는 생기가 돈다.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며 여자들은 화장을 고친다.

나도 좌석주머니에 쑤셔 박아 놓았던 물건들을 챙기고 벗어 놓았던 운동화도 다시 신는다.

비행기 기장님의 노련한 드라이브 스킬로 귀 한번 안 아프고, 내려가는 줄도 모르게 비행기는 땅에 내렸다.

보통 미국에서는 이렇게 귀가 안 아프게 내려주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울려주는데 기립박수치고 싶어서 두 손을 모았다가 아무도 안 하길래 민망해서 맞잡은 두 손을 슬며시 푼다. ^^

대한민국 국적인 사람 쪽으로 당당히 줄을 서서 입국수속을 1분 만에 마치고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마중 나온 사람과 만날 준비를 한다.

짐을 찾았다.

카트를 밀고 나온다.

빨리 나가고 싶어서 다리보다 몸이 앞서며 걷는다.

바깥으로 난 공항문이 열리고 쪽색 치마를 휘날리며 엄마가 나를 향해 뛰어 오신다.

좋아서 서로 안으며 우리는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13시간을 견디고 나니 빨간 노을이 지는 서울 하늘아래 내가 서있다.

나는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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