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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랏, 행복하네..

명동은 멀어도 괜찮아 (feat 레옹)

by 미스블루

펄펄 끊는 칼국수에 시뻘건 겉절이를 척 올려서 한입에 쏙 집어넣고 오물오물 씹는다.

고명으로 얻어져 있는 볶은 양파와 함께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는다.

통통한 고기만두를 연한초간장에 살짝 찍어 한입에 넣고 이번에는 겉절이의 뚱뚱한 배추 부분을 골라 입을 벌리고 이미 입속에 들어 있는 만두옆에 놓아준다.

입안은 알싸한 겉절이의 마늘맛과 고기육즙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조합으로 계속 먹어나갈 때 앞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조합의 배열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필사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서빙을 해주시는 분은 김치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 얼른 김치통을 가져다 말없이 수북이 겉절이만 쌓아놓고 가신다.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가 집중도가 흐려질까 봐 고개만 푹 숙여 감사 인사를 한다.

그분도 나를 방해할까 봐 서둘러 시야에서 사라져 주신다.

집중도는 하버드대학도 갈 수준으로 최고치에 올라있다.

이곳은 한국에서 명동에 나가야만 맛볼 수 있는 진짜 '명동교자' 다.

엘에이 한인타운에 자리를 잡고 해외교포가 되어버린 우리들을 즐겁게 해 준다.




고등학교 때 입시가 하도 힘들어 스트레스가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한 번씩 가던 곳이 '델리'라는 카레전문점이었다.

지금도 죽고 못 사는 친구랑 둘이 '델리'에 들어가서는 '돈가스 카레'를 하나씩 주문하고는 말도 하지 않고 카레에 얼굴을 파묻고 하얀 접시가 온 바닥을 다 드러낼 때까지 먹었었다.

카레를 잔뜩 묻힌 돈가스를 잘라 입에 넣고 밥을 한 숟가락 먹고 간장에 담근 짠지를 하나 베물어 먹고 이 조합을 고수하며 접시를 비워냈었다.

그러고 나면 울음으로 꽉 막힌 마음에 바람이 통하는 느낌이 들며 다시 펜을 잡고 연습장을 펼칠 수 있는 힘이 났었던 것 같다.

어리면 어린 대로, 청년기엔 또 청년기대로, 중년은 또 중년대로 나름의 고민으로 몸을 가누기 불편할 때 특정한 음식들이 위로꾼이 되어줄 수 있는 것 같다.

이 음식들은 혀끝을 자극하여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다음 걱정으로부터 살짝 끌어내어 놓았다가 다시 허겁지겁 근심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하는 찰나에 배가 불러 나오는 나른한 하품으로 감싸 안아 살짝 재우는 수법이다.

그래도 꽤나 먹혀들어가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는 말이 나오게끔 하는 것을 보면 꽤나 유능한 위로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 무조건 '명동교자'로 향해야 한다.

창밖에 풍경은 미국인데.. 비는 내리는데.. 내 앞에는 명동에나 가야 맛볼 수는 있는 진짜 명동칼국수와 겉절이와 또랑또랑한 만두가 놓여 있을 때... 나는 이 순간 그저 '어랏 행복하네..' 이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이래서 엘에이 사는갑소'를 외치며 나의 애증의 엘에이를 오늘은 '사랑함'이라고 표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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