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책플릭스 55화 <말하는 몸>에 출연한 박선영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방송에는 더 풍성한 내용이 담겨있으니 책플릭스 채널(본문 아래 링크)을 확인해주세요.
내 몸은 실패만 하는 거예요
맨날 다이어트 실패하고. 살이 또 쪘고. 그리고 살을 빼도 너무 볼품없어. 뭘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이 몸이. 그 실패한 이야기를 어디에서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나의 실패로 끝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으면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확신이 드는 거죠. 이런 몸에 대한 수치심이나 혐오감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유난히 더 많다.
저랑 같은 일터에서 일하는 동료가 레몬수 다이어트를 했어요. 진짜 일주일 만에 싹 마르는 거에요. 그런데 일주일 후에 다시 또 쪘어요. 그걸 보는 나는 그 사람이 그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알아요. 저도 그런 무리한 다이어트의 경험이 있고 폭식증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알지만 제가 먼저 가서 얘기를 할 용기는 전혀 없거든요. 몸의 치부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아무도 꺼내지 않는데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어디서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할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죠.
배고픔이 있었어요
제가 <말하는 몸>을 기획할 때 시사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는데 버려지는 이야기들이 진짜 많다고 느꼈어요. 기사 거리가 되는 새로운 사실, 아니면 논란이 되는 주요 인물의 발언을 항상 쫓아다니다 보니까 마이크가 너무 가는 곳에만 가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게 된 거죠. 거기에서 그 문장이 너무 좋았어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지금까지 마이크가 덜 간 사람들, 그 사람들의 자기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우리가 외면하고 제대로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깊이 있게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유지영 기자와 함께 <말하는 몸>을 시작하게 됐죠.
성폭력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잖아요
성폭력 피해경험을 방송하는 건 고민이었죠. 그런데 저희가 먼저 찾아가서 섭외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진짜 내가 말을 하겠다고 결심한 분들만 출연하신 거예요. '나 이제 아무렇지 않아' 해서 나온 분은 아무도 없을 거 아니에요.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에 있는 혼란을 정리하고 싶다는 분도 있었는데 양가감정이 있는 거죠. 가까운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했고, 이 사람과 계속 연관이 되어 있어서 안 보고 살 수도 없고,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이 녹록치 않아졌을 때 약간 연민을 느끼기도,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또 내가 그동안 괴로웠던 걸 생각하면 갑자기 불쑥불쑥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런 거예요.
그 얘기를 하신다고 했을 때 저도 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 얘기를 하고 나서 또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어떤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들이 인터뷰를 거절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걸 다시 상기시키기 싫어서거든요. 그런데도 계속 상기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분의 투쟁이겠죠.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이야기해서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일 수도 있고, 이 혼란에 대해서 어떻게 해소할지를 모르겠으니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다. 한번 해보자. 이런 의미일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가해자에게 절대 용서받을 생각 하지 마라, 이렇게 저주하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는 분도 있었어요,
성폭력 피해는 현실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자기 옷깃을 추스르면서 일어났는가. 어떻게 대응했는가. 후폭풍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런 얘기를 깊이 있게 듣기는 어렵잖아요. 성폭력 피해가 일어난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는 거잖아요. 밥 먹고 씻고 양치하고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는 건데 그런 상상을 안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계속 그런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어떤 사안을 만날 때나 상상하고 좀 더 기억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어요.
세월호 유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말하는 몸>을 만들면서 저는 처음부터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처음에는 그 세월호라는 이름을 걷어내고 원래 자기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했어요.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나는 되게 몸이 약했고 엄마가 미음 같은 걸 겨우 떠먹여주면서 자랐다거나, 아토피가 너무 심했다, 이런 얘기들. 그런데 우리의 이야기는 자꾸만 결국은 세월호로 가는 거예요.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이유는 결국에는 우리 몸이라는 게 나의 몸 하나 안에만 갇히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말하는 몸>을 만들면서 스스로 몸에 관한 콤플렉스나 연민에 너무 휩싸여 있는데 자꾸 밖으로 눈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몸, 그리고 그 몸에 얽힌 이야기와 기억들을 우리가 서로 들으면서 나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도 서서히 극복한다고 해야 할까. 잊어가고 다른 타인의 몸에도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어요.
제 몸이 너무너무 싫었을 때가 있었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를 안 좋아할 때 처음 생각이 몸으로 가요. 더 슬픈 건, 이게 어떠한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어요. 무슨 노력을 해도 다시 태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저 스스로 제 몸에 대해서 그런 세속적인 기준들을 막 주입하기 시작하는 거죠. 역시 쟤는 내가 이거가 모자라서 안 좋아하나? 사실 그 사람은 여러 다른 이유들로 나를 안 좋아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평소에 날 재단했던 몸에 대한 기준들을 들이대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거죠. 그럴 때 내 몸의 구석구석 모든 게 엄청 싫죠.
사람마다 다 진짜 고유하잖아요. 다 다르잖아요. 저는 그걸 머리로는 알거든요. 그게 나에게는 전혀 적용이 안되는 게 인생의 불가사의에요. 그런데 제가 사실 <말하는 몸>을 만들고 나서 몸에 대해 생각을 많이 안 하게 됐어요. 내 몸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게 되게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느껴졌는데 이 수많은 몸들의 얘기를 듣고 나니까 몸을 조금 벗어나서 다른 이야기를 더 듣고 싶고 조금 더 다른 곳에서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큰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사실 이렇게 내 몸을 엄청나게 뜯어보거나 혐오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말하는 몸이 되는 게 정말 중요해요
말하는 몸에 출연하고 싶다고 실제로 연락을 주는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이렇게 연락을 주시는 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게 되어서 연락을 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가 나처럼 용기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몸이 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말하는 걸 보고 누군가가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또 그걸 말할 용기를 얻음으로써 점점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는 거잖아요.
저는 이런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거든요. 생리 이야기도 대놓고 깔깔거리면서 할 수 있고 성폭력 사건을 겪더라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쉽게 꺼내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 정체성으로만 살아가지 않고 자기 일 열심히 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은 '우리가 말하고 언제든 이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다,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안정감 있는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 같거든요.
다른 사람의 몸 안에 담긴 얘기가 궁금해요
저는 <말하는 몸>을 만들고 몸에 덜 갇히게 되었어요. 조금 덜 생각하고 이 몸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더 고민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도 어떤 인상을 지우고 이 사람의 몸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그 몸 안에 담긴 얘기가 더 궁금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그 몸에서 뿜어지는 것들이 또 너무 다채롭고 좋게 들리는 거예요. 목소리라든가 입고 온 옷이라든가 손동작이라든가 이런 식으로 다른 것들이 또 보이는 거예요. 그 몸과 관련해서 그 사람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말하는 몸에서 나온 이야기들보다 더 진전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말하는 몸을 시작할 때는 우리가 콤플렉스를 겪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기록하자, 우리가 이 시대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들어보자, 이런 마음으로 했다면 이제는 다같이 좀 더 연대하고. 어떤 일을 좀 더 할 수 있을까. 힘을 모으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이렇게 몸에 대해 생각을 덜하게 됐다라고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서의 차별은 우리 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건 너무 변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이죠. 그러나 다들 상처도 받지 마시고 용기 내시고 말하는 몸을 듣고 또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소중하고 되게 고유하고 엄청 멋진 것으로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하루 잘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