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의 역설 - 약자보호를 위한 도급/파견법이 업체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본 블로그에서는 하도급법, 파견법 등이 취지와 다르게 금융 IT에서는 어떤 부정적 효과들을 발생하게 하는지 살펴보고, 법규제 리스크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생산성 저하를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고자 한다.
IT서비스산업에 있어 갑을병 계약관계에는, 하도급법, 파견법 등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법적 규제가 존재한다. IMF를 계기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만들어진 파견법은, 파견근로자의 고용안정,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경제민주화 1호 법안인 하도급법은 부당 대금지급지연, 부당 단가인하, 부당 발주취소 등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 규제들은 대기업 위주의 국내 산업에서 중소기업의 거래 조건과 협상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선한 취지 하에 많은 부당한 관행을 개선해 왔다. 예를 들면, 하도급법 규제가 강화됨에 따라 금융기관(갑)-대기업 SI사업자(을)-중소협력사(병) 간의 SI사업이 진행될 경우, 대기업인 을은 갑과의 대금지급조건과 무관하게 중소기업인 병에게 대금지급을 우선적으로 진행해 왔다.
반면 하도급을 둘러싼 불법파견 논란이 적지 않다. "불법파견"으로 간주되고, 하청업체의 근로자 측에서 불법파견으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재판 결과에 따라, 직접 고용관계를 인정해야 하는 리스크가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 투입되어, 앞바퀴는 정규직이 만드는 반면 뒷바퀴는 하청업체 직원이 도급으로 참여하는 경우, 하청업체 직원을 갑사에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는 법적 리스크가 있다. 갑사 입장에서는 민원 및 분쟁 대응에 따른 소송비용뿐만이 아니라 고용의무 이행에 따른 조직전체비용의 증가, 사업주 처벌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금융기관도 실제 노무법인으로 부터 정기적인 진단을 받는 등 불법파견에 대응한 리스크 헷지를 위해, 조직 전체가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실제로 위장도급의 판단기준으로 사용되는 대법원 판결의 기준을 살펴보자. (실제 IT서비스업 보다 제조, 건설업에 적합해 보인다) 우선 업무상 지휘명령, 인사노무 관리권한에 대한 기준으로, 업무지시와 감독권한을 누가 갖고 있는지 작업배치와 변경에 대한 결정을 누가 하는지 그리고 채용/해고/휴가/연장근무 등에 대한 인사관리 권한을 누가 행사하는지를 판단 기준으로 한다. 그리고 하청업체의 업무가 원사업자의 사업에 얼마나 편입되어 있는지, 원사업자(갑)의 업무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계약목적이 잘 확정되어 있고 업무 수행을 위해 하청업체가 별도의 전문성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또 계약목적 달성을 위해 별도의 조직과 설비와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지 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정상적인 도급계약에서는 원사업자(갑)의 지휘명령이 아니라, 수급사업자(을 또는 병)의 관리자를 통해 지휘명령을 받아야 한다. 금융 IT서비스에 있어서 갑이 모든 업무요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을이 이를 기반으로 분석, 설계, 개발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은 현실적이지 않다. 더구나 요건이 불확실한 디지털 IT 업무에서는 긴밀한 협업이 필수적이다. 자동화되어 있는 제조 공정에서 정해진 프로세스에 따라 작업하는 작업자와, 개인의 전문성과 판단에 의해 일을 진행하는 개발자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라고 봐야 하는데, 제조업에 적합한 도급/파견법을 IT서비스에 무리하게 적용하는 거 아닌가 싶다. 또한 실제 불법파견에 판단 기준은 법원의 재량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이런 불법파견 리스크에 대비하여, 실제 현장에서는 을 회사, 병 회사에 각각 관리자를 두고 지휘명령체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문서 작업 또한 이에 맞게 준비해 두고 있다. 이 경우 소수의 프리랜서 인원으로만 수행하는 병사, 정사 입장에서 보면 관리를 위한 추가적인 현장대리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도급자의 개발자에 대한 업무지시는 항상 하도급업체의 관리자 또는 현장대리인을 통해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가능한 작업장을 분리해서, 하도급 회사의 직원들만 근무할 수 있도록 층을 분리하거나 또는 파티션을 설치한다. 고객의 요구와 기술적 제한요건 등을 같이 고려해야 하는 요건정의 회의에는 가능한 갑사 직원들만 참석하고, 을사와 병사의 직원은 참석하지 못하게 한다. 갑사는 이러한 요건을 잘 정리해서 하도급 회사의 관리자에 전달하고, 제대로 구현되는지를 관리하는 역할에 집중한다. 하도급 협력사의 개발자는 단순히 구현하고 기능 테스트만 통과하면 된다. 어떻게 보면 현대판 카스트제도와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불법파견 리스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의 추가비용 부담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실제로는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관리업무의 가중과 전체적인 생산성 저하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눈에 잘 보이지 않는 SW를 만드는 과정은 갑을병간 협업과 심도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제조업 대비 더 많은 행정적인 비용과 함께 생산성 감소를 초래한다고 보인다. 갑사 직원의 생산성뿐만 아니라, 실제 개발을 수행하는 을사 병사의 개발자들의 생산성도 낮아진다. 하도급업체의 개발자도 성장해야 하는데, 현업과의 직접 접촉과 커뮤니케이션 등 의미 있는 성장의 기회가 차단된다. 대부분의 SW 개발은 한 공간에서 긴밀한 협업을 수반하는 고도의 사회적인 활동인데, 규제 대응을 위해 높은 수준의 Bureaucracy를 강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를 통해 규제가 보호하려는 중소업체의 경쟁력도 약화시키게 된다. 결국 하도급업체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계속해서 하도급업체에 머무르게 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전통적인 규제산업인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불법 파견으로 인한 근로자성 이슈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파견법, 하도급법을 준수하기 위한 주기적인 진단과 대응은 불가피한 사항이다. 시장에서 개발자 단가가 오르면서, 그리고 개발자가 이직할 수 있는 우호적인 환경이 계속되는 한 협력사 소속 개발자가 근로자성을 이슈로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할 확률은 낮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나 성과저조자 또는 부적응자가 있으며, 불법파견을 이슈로 소송을 제기할 위험은 상존한다. 따라서 정기적인 노무진단과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은 당분간 불가피하다고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기관은 디지털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술 내재화를 위한 내부인력 비중, 즉 인소싱 비중을 지속적으로 늘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갑을병을 구분해서 일할 수 있는 단순한 자동화 가능한 문제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하는 문제영역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금융이 중요해지면서, 개발자와 IT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호봉제와 고용의 유연성이 없는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정규직 채용에 보수적인 입장이다. CIR(Cost Income Ratio)이라는 효율성 지표를 보면서, 시장에서 금융기관들과 경쟁하는 상황에서 단기적으로 인소싱을 늘리기는 어렵다는 점도 있다. 금융기관의 적정 인소싱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로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딱딱한 갑을 관계의 계약관계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비지니스 문제가 많아지면서, 대안으로 갑과 을 간에 신뢰를 기반으로 한 Agile계약 형태, 또는 성과기반의 서비스 계약을 시도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내에서도 실험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규제에 민감하지 않은 소수의 외국계 금융기관을 제외하고는 실제 제대로 작동하시키기 어려웠다. 모 금융기관에서 Agile 계약 (턴키 계약이 아닌 MM 대가만 지불하는 형태)을 준비하고 실행했지만, 실제로 갖추어야 하는 서류 (2주 스프린트마다 완성도를 증빙하는 문서작성 및 제출)와 절차가 많아서 실제 현업부서에서 기피하면서 실제로는 잘 적용되지 않았다. 갑사 내부의 현업과 IT부서 외에 구매, 감사 등 금융기관 내부의 여러 부서 간의 합의와 이해가 작동해야 가능한 계약 방식이라고 판단된다.
개인의 입장에서도 본인이 하는 일이 근본적인 가치를 창출해야 더 보람을 느낄 것이다. 갑사에 소속된 개인들은 자신의 시간을 행정적인 일 보다 실질적인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개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리스크를 부담하면서 책임감있게 일하고, 개별 조직은 규제 리스크 위험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관리업무 부담으로 신입직원 상당수가 퇴사한 모 금융기관처럼, 처우가 낮더라도 실질적 경력개발을 위해 기술회사로 전직하는 사례가 반복될 수 있다. 을사, 병사에 소속된 개인들 또한 엄격한 규제 준수를 방패 삼아 당장의 업무적인 압박과 부담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울 수 모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개인의 발전과 성장이라는 점을 같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