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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기계, 소비기계

생산기계, 소비기계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에 공학기술, 의료기술, 정치기술이 종교이자 구원이 되었다. 그래서 현대사회가 기술에 대한 맹목으로 특징지어진다'라고 얘기했다.

이 말은 무슨 얘기인가?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종교였다.

일이 잘 되도록 하려면 기도를 하는 것이고 몸이 아프면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로 오면서 모든 것은 종교적 기도가 아닌 과학 즉 기술이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목사나 신부도 몸이 아프면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술은 현대에 있어서 종교가 되었고 우리를 구원해줄 구세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에 맹목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발전을 저해하는 나쁜 생각으로 배척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은 종교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목적이 된 사회에서는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수단이 되었다.

즉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그에 필요한 것들이 수단이 되어 과학기술을 뒷받침 해줘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다시 풀어 얘기하자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방적기, 증기기관 등 기계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석탄, 석유, 전기인데 그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자연에서 난다.

그래서 자연은 수단이 된다.


예를들어 강은 수력발전소가 들어오면서 전기를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즉 강이 가진 이미지인 자연, 자정작용, 물고기를 비롯한 수생동식물의 어머니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만나 전기를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전락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자연은 자원이라는 말로 대체 되었다.

그래서 지구는 커다란 자원공장으로 변하게 된다.

강은 수력발전소, 석유를 파내는 사막은 유전, 석탄을 파내는 산은 채탄장, 대지는 식량공장, 숲은 펄프공장이라는 말로 대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연은 천연자원이 된 것이다.


과학기술과 만나면 사람도 자원으로 변화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적자원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연인이 아니라 기술과 만나면 자연과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수단 즉 인적자원으로 바뀌게 된다.그래서 과학기술 앞에서 인간은 생산하는 공장에서 기계의 부품이 되어 기계처럼 살아가게 된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람은 노동을 사고 팔게 되는데 그것은 자본가들의 자본이 투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자본가들은 일단 자영업자들을 자본으로 없애기 시작한다.

자영업자들은 시장이 생기던 예전부터 있었던 사람들이다.

자영업자들의 특징은 하나의 기술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빵을 굽는 제빵사, 고기를 다루는 식육판매업자, 베틀을 가지고 직물을 만들던 면직물 기술자, 양복재단사, 구두장인 등이 대표적인 자영업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자영업자들은 자본가들이 보기엔 너무 비효율적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옷을 만들고 구두를 만들지만 생산성은 너무 형편없었던 것이다.

놀고 싶을 때 놀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담스미스는 분업을 통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고 그것이 바로 핀공장이다.

핀공장을 통해서 사람들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핀공장에서 핀을 만들던 자영업자는 소멸하고 자본가가 자본을 투입하여 핀공장을 운영하게 된다.

핀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핀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던 자영업자가 아닌 핀을 만들기 위해 수 십가지로 일이 분업화되어 한가지 일만 하는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핀공장은 분업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어 자본가에게는 커다란 부를 안겨주지만 사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생산직 노동자는 자본이 투입된 공장의 인적자원이 되어서 생산하는 기계부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얘기한 천연자원과 다를바가 없다.

물론 자본가들은 엄청난 자본을 투입하여 자영업자들이 하던 직종을 파괴했다.

빵공장을 만들어 동네 빵집을 없앴고 기성복을 만들어 양복점을 없앴으며 세탁편의점을 만들어 세탁소를 없앴다.


이렇게 만들어낸 생산물은 시장으로 나가 소비하게 되는데 소비는 이들 생산을 하였던 노동자가 임금으로 받은 돈으로 소비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소비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비자의 역할은 생산직 노동자의 역할과 다를바가 없다.

생산직 노동자가 기술의 생산을 맡았다면 그 생산물을 소비하는데 필요한 소비기계의 역할이다.


자본가들은 생산물의 소비를 위해 질투심과 같은 인간의 욕망을 이용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알렉산더 대왕의 위인전을 읽다가 질투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아니 알렉산더 대왕 이자는 이렇게 땅을 많이 정복했어? 정말 배가 아픈걸?" 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주로 질투심은 우리주변에서 일어난다.


페이스북과 같은 SNS는 모르는 사람과 연결하지만 그들이 연결하는 사람들은 교묘히 그들과 취향, 학벌, 나이 등이 비슷한 사람들과 연결이 된다.

이것의 이유는 전혀 다른 모르는 사람들과의 연결이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연결이고 이러한 것은 알고리즘으로 특허까지 내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대졸자 몇 점, 어떤 직업은 몇 점이라는 식으로 점수를 내어서 그들끼리의 끼리끼리 문화를 만든다.

끼리끼리의 문화로 뭉치면 질투가 더 심해진다는데 있다.

페이스북 친구 중 포르쉐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는 사진을 올리게 되면 페이스북 친구들이 좋아요를 누르게 함으로써 질투심을 유발하게 되고 그 질투심은 자신의 소득수준 이상의 과소비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자녀의 명문대학 입학 축하를 자축하는 인증샷을 올리면 그것을 보고 사교육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가?

우리는 익숙함에 바로 적응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비싸고 멋진 새차를 사더라도 일주일 후에는 그것에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방어기제에서 출발 했다.

인간의 방어기제는 슬픔에 대한 방어기제이다.

연인과 이별을 하거나 부모님을 떠나보내거나 반려견이 죽을 때 말이다.

그럴 때 처음에는 슬프지만 인간의 뇌는 이것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데 익숙해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익숙함은 슬픈 일뿐 아니라 기쁜 일도 마찬가지로 익숙해지도록 프로그램 되어졌다.

그래서 새로운 아파트에 새 차를 사고 많은 연봉을 받더라도 금방 익숙해 진다.

그래서 질투심에 못 이겨 새차를 샀다면 일주일 후에는 혹은 한 달 후에는 금방 익숙해지고 행복한 시간은 잊혀진다.

그리고 괴로움만 남는다.

할부금을 갚아야 하는 괴로움 말이다.


어떤 이는 요트를 팔았는데 가장 좋았을 때가 언제 였냐고 물어보니 샀을 때와 팔았을 때 딱 두 번이었다고 한다.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이유는 나오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요트는 나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다.

친구들을 초대해야 한다.

그래야 자랑질을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친구들을 부르면 그냥 부르는가?

멋진 저녁식사를 위한 준비를 내 돈 들여서 하고 그들이 놀고 가고 나서는 청소와 설겆이를 자신이 해야 하낟.

더 괴로운 것은 정박에 필요한 돈일 것이다.

유지비가 꽤 들어간다.

그러니 요트를 사고 나서 생각지 못한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다가 팔고 나서야 즐겁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우리를 생산기계와 소비기계로 전락 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물욕을 이용하여 자발적으로 생산하도록 만들었고 우리의 질투심을 유발하여 소비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이로써 생산기계와 소비기계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여 열심히 물건을 만들고 저녁 때 퇴근하여 열심히 쇼핑한다.

이러한 삶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쾌락만을 쫓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신이 이런 것을 쫓는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불행피하기 기술이라는 책을 쓴 롤프 도벨리는 설문조사를 소개 했는데 그것이 재미있다.


설문조사  


다음 활동은 당신에게 얼마나 즐거움을 주는가?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 것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
취미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우는 것
지구 온난화를 막는 것
올림픽 경기를 보는 것
카리브해로 힐링여행을 떠나는 것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 주는 것
게임을 하면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


위의 활동 중 나에게 얼마나 즐거움을 주는가를 0부터 10까지의 점수를 매겨보라는 것이다.

아마도 초콜릿을 먹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올림픽 경기를 보거나 카리브해로 힐링여행을 떠나는 것이 높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질문을 바꿔본다.

위의 열거한 활동들 중 당신이 얼마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은 무엇인가?

아마도 내가 점수를 많이 준 것들이 아무 의미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수가 낮았던 활동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PC방에서 새벽같이 가서 하루 종일 게임을 하고 나서 나왔더니 별이 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허탈했던 기분이 드는 것이 그 이유다.


물론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의미없는 일들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 의미없어지니까 말이다.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생산기계와 소비기계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물론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활동을 알고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자.

그래야 어떤 기업이 이러한 욕망을 자극하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업은 나를 자극하지 못하더라도 남을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물론 나를 자극하고 있다면 그 기업은 자본주의의 본분에 충실한 기업이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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