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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권력 그리고 도덕성

재판, 권력 그리고 도덕성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은 '위험'
善意 내세워 나쁜 수단 정당화하게 될 뿐
판사도 '법 권위' 독점했다 착각 말아야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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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학자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에 따르면 정치권력의 핵심적 관심은 권력 취득과 유지에 있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도덕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제도를 갖추면 권력이 그 취득과 유지를 위해 공익에 보다 더 봉사하고 국민의 복지에 기여하려는 동기를 가지게 된다.



교회가 정치권력까지 장악한 시대가 있었다. 당시 교회는 도덕성을 독점했고, 교황에게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교의가 지배했다. 정치권력이 도덕성까지 장악하면 브레이크가 없다. 그 결과 종교재판이나 사상 통제와 같이 비록 선의로 시작했더라도 처참한 결과를 낳은 정책이 시행됐다. 고문과 화형, 마녀사냥, 비인간적 해외 식민지에 대한 지지는 도덕성을 독점한 권력이 결과적으로 도덕성을 상실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후에도 크롬웰, 로베스피에르 등 도덕적 우월성을 자부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잔혹한 행적을 남긴 사례는 대단히 많다. 자신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집단, 상대방을 부도덕한 악의 집단으로 규정하게 되면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선택에서 자제가 줄어들며 훨씬 잔혹하고 과격한 대처를 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정부는 9·11 공격을 겪은 후 테러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해 법원 영장 없이, 가족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체포 구금한 적이 있다. 무기한 구속 상태에서 잠을 재우지 않거나 의지력을 약화시키는 약물을 강제로 주사하고 심지어 직접적인 고문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강제 수사를 했다.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한 이상(소위 ‘테러와의 전쟁’) 이는 적 전투요원에 대한 대응일 뿐 형사 절차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악의 축에 대항하는 미국의 도덕적 우월성에 더해 피해자로서 복수의 공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가진 많은 미국 시민들은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침내 미국의 사법부가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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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역시 자본주의에 대해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과 역사적 진보성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확신 위에서 공산주의를 위협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은 자들은 실제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방 또는 교육 차원에서 인민으로부터 격리하고(즉 구속, 감금)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해 노동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등 적당한 조치를 한다. 과거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무수히 일어났던 일이고, 중국에서도 문화혁명 때 수많은 사람이 단지 지식인이라거나 고위관료라거나 잘살았다는 이유만으로 하방(下放)당해 탄광이나 벌목장이나 돼지농장에서 기한 없이 가혹한 강제노동에 내몰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고결한 것이라고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아가 그 이념의 구현을 위해 선택하는 수단이나 절차가 다소 부적절하거나 편법적이라도 좋은 결과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종교인이 종교의 권위와 도덕성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기 쉽듯 판사도 법의 권위와 도덕성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판사가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잘못된 독선을 내보인다면 재판받는 사건 당사자가 느낄 절망과 무력감은 형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패소한 사람은 자신의 인격적 가치를 부정당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법정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는데 그중에는 남편의 일 때문에 가슴 졸이며 법정에 들어온 탁월한 문인도 있을 수 있고, 친구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낭패를 당한 뛰어난 예술가도 있을 수 있으며,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많은 세금을 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에 실패한 사업가도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식으로부터 존경받고 배우자로부터 사랑받는 많은 훌륭한 이웃들이 있을 것이다.




잘못된 독선을 가지지 말자고 늘 스스로를 경책하며, 패소한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재판은 사건에 대한 것이며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재판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이 살아온 삶에 대한 가치 평가가 아니다. 문제가 된 사건에 대해 합의된 절차에 따라 법을 적용한 결론일 뿐이다.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91926191 

부자가 하는 말보다 가난한 자의 눈물에 더 많은 연민을 가지도록 하게

그렇다고 가난한 자의 편을 들라는 건 아니네


정의는 공평해야 하니까 말일세


가난한자의 흐느낌과 끈질기고 성가신 호소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자의 약속과 선물속에서도 진실을 발견하도록 해야 하네.


중죄인에게 그 죄에 합당한 무거운 벌을 내릴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경우에 서더라도 너무 가혹한 벌은 내리지 말게


준엄한 재판관이라는 명성은 동정심이 많은 재판관이라는 명성보다 더 좋은게 아니라서 그러하네.


정의의 회초리를 꺾어야 할 경우가 있다면, 뇌물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자비의 무게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네.


자네의 원수와 관련한 소송을 재판할 일이 생길 때는, 자네가 받은 모욕은 머리에서 떨쳐 버리고 사건의 진실에만 생각을 집중해야 하네,




자네와 관계없는 소송에서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눈이 멀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 말일세,


그런 일에서 만일 실수를 저지른다면 , 대부분의 경우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네.


설혹 있다 하더라도 자네 신용을 희생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재산을 잃을 것을 감수해야 한다네.


만일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자네에게 판결을 요구하러 온다면, 그녀의 눈물에 눈을 두거나 그녀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녀가 요구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차분히 생각해야 하네.


그녀의 눈물에 자네의 이성이, 그녀의 한숨에 자네의 착한 마음이 휘말려 버리는 게 싫다면 말일세.


체형으로 다스려야 할 사람을 말로써 학대하지 말게. 체형의 고통은 고약한 말을 보태지 않더라도 그 불행한 사람에게는 충분하네




자네의 사법권 안에 들어올 죄인을 타락한 우리 인간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라고 생각하며 가엾게 여기게.


자네 쪽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상대를 모욕하지 말고, 늘 인정과 자비를 베풀도록 하게,


하느님의 속성들이 모두가 다 똑같이 훌륭하긴 하지만 특히 자비의 속성은 정의의 속성보다 훨씬 눈부시고 뛰어나 보이기 때문이네.




돈키호테가 하인 산초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마치 판사에게 하는 말과 같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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