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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왜 사회에 불만이 많은가?

청년은 왜 사회에 불만이 많은가?


이병태 교수의 페이스북 글이 있다.


젊은이 들에게 가슴에서 호소합니다

http://www.m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747


이 글을 보면 청년들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산업화 시대를 살고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헬조선이라는 청년들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이병태 교수의 말이 틀린 말이 없다.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청년들도 헬조선이라는 말도 단군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도 취업이 안 되는 현실 때문이다.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서양은 미리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는가?


아파트도 우리나라가 먼저 짓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층 아파트가 재건축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어디에서 증거를 찾으면 되는가?

바로 서양에서 찾으면 된다.

왜냐하면 서양에서 아파트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2층도 없는 한옥을 지어서 살지 않았나?

그러니 재건축에 대한 의문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니 아파트 재건축이건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건 모두 서양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이 맞다고 본다.


지금의 모든 문제는 경제문제이다.

먹고 사는 문제라는 것이다.


중세시대까지는 이러한 먹고사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사회시스템의 문제였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얘기냐?

귀족이나 성직자 등으로 태어났으면 농노가 소작해서 생산한 생산물을 착취하는 구조였다.

물론 지대나 세금 등으로 거두 들였고 굶고 안 굶고는 태어난 신분에 의해 결정 되었다.

농노로 태어났으면 농노로 죽도록 일만 하다가 사는 신분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하다가 병이라도 걸려 자리에 눕게 되면 굶어 죽는 것은 다반사였다.

병 말고도 가뭄이라도 들면 마을 전체에서 대부분이 굶어 죽기도 했다. 

그러니 먹고 사는 문제는 신분의 문제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분의 문제라는 것은 바로 구원론과 연결된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구원론인가?

종교에는 모두 구원론이 있다.

구원론은 개인이 원하는 세상은 자유와 평등이 있는 사회를 말한다.

그러한 자유와 평등이 있는 사회는 현실에서는 구할 수 없고 종교에서 원하는 바를 행하면 죽은 후에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구원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신분사회의 모순을 농노들은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먹고사는 문제가 언제 개인의 문제로 나타났을까?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고 개신교가 사회에 퍼지면서 브르주아가 나타났다.

그전까지는 개인이 큰 돈을 버는 것이 힘들었는데 브르주아는 동인도회사와 같은 기업을 통해 무역 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큰 돈을 버는데 그것에 대한 세금을 왕이 가져 갔다.

그런데 잘 생각을 해보면 왕이 왜 내 세금을 가져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답하지 못한다.

즉 왜 너는 왕이고 내 소유를 네 마음대로 가져 가냐는 것이다.

그래서 의회가 나타났고 의회는 왕이 전쟁자금을 쓰려고 귀족에게 세금을 걷는 것을 아무 때나 가져가면 안 되고 일정액만을 의회가 승인한 부분에서만 가져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왕권이 발달한 대륙에서는 왕권의 권력을 왕이 독점했으나 영국과 같은 왕권이 약한 나라는 이러한 브르주아의 불만을 왕과 권한을 나누면서 풀었다.


원래 영국은 왕의 권한이 약한 전통이 강했는데 그것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까지 올라간다.

마그나 카르타와 명예혁명의 큰 공통점은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개인의 소유권을 함부로 강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미헌법의 기초가 되는 기본권인 생명권, 자유권, 소유권을 국가가 개인의 기본권을 강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개인의 권리는 보장이 되고 개인의 권리가 보장 된 것은 국가의 부가 늘어나며 자본주의(자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되는 기초가 된다.


예를들어 자유 시장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A와 B가 거래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거래가 잘 일어난다는 얘기는 무엇인가?

A와 B가 서로 이익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A가 급하게 자신의 집를 팔아서 사업자금을 쓰려고 부동산에 내놓았다.

그러자 B가 이것을 급매로 샀다면 누가 이익일까?

A와 B서로가 이익이다.

왜냐하면 A는 당장의 부동산을 싸게 판 것은 손해이나 그래도 팔아서 사업자금으로 써서 회사의 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면 이익이라는 얘기이고 B는 부동산을 싸게 사서 이익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는 둘 다 이익이 아니라면 시장에서는 거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국가에서 A에게 양도소득세 50%를 때리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5억 짜리 아파트를 팔려고 했더니 국가에서 매매가의 50%인 2억 5천만 원을 세금으로 때린다고 한다.

그러면 얼마에 팔아야 하는가?

세금을 제하고도 남는 금액에 팔아야 한다.

그러려면 매매대금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B는 5억 원 정도면 사려고 했는데 세금을 더 붙인 액수는 받아 들일 수 없다.

그러니 거래가 잘 이루어질리가 없다.

즉 이러한 국가의 개입은 시장의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A가 만약 B에게 팔았는데 갑자기 국가가 B가 산 부동산을 가져가 버렸다면 어떻게 되는가?

거래는 이뤄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 특히 농민이 어려웠다.

왜냐하면 양반은 국가에 세금을 안 냈는데 돈 주고 양반을 산 평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세금의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만 정도의 평민이 1000만 이상이 내야할 세금을 부담을 해야 하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이사벨라 비숍이라는 여행작가가 있다.

비숍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모두 4번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다. 그리고 1897년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에 출판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를 출간했다.

그녀는 조선의 농민을 아주 게으른 사람으로 표현했는데 왜냐하면 농토가 있는데도 개간을 안 하고 그냥 놀리는 농민을 보고 왜 일을 안 하냐고 묻자 농민이 대답했다.

" 누구 좋으라고? " 

농사를 지으면 관아에서 다 빼앗아 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관리를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표현했다.

물론 이러한 것은 매관매직이 조선 후기에 극심했고 매관매직을 통해 관직을 사서 온 관리는 자신이 관직에 있는 동안 소위 뽕을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만주에 가서 깜짝 놀란다.

가장 열심히 일하고 그곳에서 부농으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 게으르다고 생각한 조선의 농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것이 아니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그리고 재산을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굳이 생산하려 하지 않는다.


즉 자유시장경제가 발달하려면 거래가 잘 되어야 하고 거래가 잘 되려면 A와 B의 거래의지만 있으면 된다.

중간에 국가가 개입해서 세금을 걷고 강탈한다면 자유 시장경제는 거래비용의 상승을 불러오고 거래가 일어나지 않아 국가의 부는 늘어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가장 시장이 잘 돌아가는 체제는 자유 시장경제이며 자유시장경제가 되려면 자유 민주주의의 바탕하에 법치주의로 개인의 소유권, 재산권이 보장되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는가?

바로 왕권이 약해서 개인의 재산권이 잘 지켜졌기 때문이고 그것을 법으로 제정해서 개인의 재산을 보호해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신분사회가 무너진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어떤 구원론이 생겼는가?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현재 사는 세상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종교개혁으로 근대적인 개인이 나오면서 가능해졌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바로 마르틴루터가 면죄부를 파는 로마카톨릭에 대항하여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된 것 아닌가?


교황은 왜 면죄부를 팔았을까?

교황의 권위가 세속의 왕보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보여줘야 했고 성베드로 성당을 지으려는 목적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그런데 문제는 왕의 권위가 센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많이 팔지 못했고 수 백개의 공국으로 갈라져 왕의 권위가 약한 독일에서 집중적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그래서 독일에 있던 마르틴루터가 이에 대항하여 로마카톨릭의 면죄부의 잘못을 성경을 근거로 반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어떤 것을 가지고 반박을 했나?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갈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신27:26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롬4:14


성경을 릵지는 않지만 갈라디아서를 인용 하겠다.

이 내용은 무엇인가?


바울이 여기서 노예와 자유인을 대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조하는가?

바울은 유대인의 할례당의 복음과 십자가 복음을 대조한다.

바울은 주장하기를 할례당의 복음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맞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할례당의 복음이 틀렸다고 하는가?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을 받을 때 할례당의 복음은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반드시 할례를 받고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므로 틀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위를 할 필요 없고 이미 죄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없어졌기 때문에 믿음만 있다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얘기는 무엇인가?

로마카톨릭은 면죄부 파는 행위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이 주장하는 그런 것은 성경에 없다. 

성경에 나온 말씀에 따라 믿음만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의 면죄부 구원론은 노예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이고 성경을 통한 구원론은 자유인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 된다.

주체적으로 자신이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예와 자유인은 어떻게 다른가?

노예는 시키면 하고 안 시키면 안 한다.

그러나 자유인은 시키고 안 시키고가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카톨릭의 면죄부 구원론은 면죄부를 사는 행위를 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아무리 믿어도 원죄가 있어도 지옥을 가는데 이 면죄부만 사면 너는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억지로 믿지 않아도 면죄부를 사는 행위만 있다면 바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믿는 사람은 지옥가고 안 믿어도 면죄부만 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것 안 사면 지옥가니까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율과 강요에 의한 구원론이니 지옥엘 간다는 것이다.

이 행위를 통한 구원이라는 것이 절대 자유인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노예만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한 구원론에서의 개인은 기본적으로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인은 선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이고 심지어 선에 관한 것도 강요 받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자신이 선택한 선을 많이 베풀어도 선에 대해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의 구원론은 행위를 하고 나는 이만큼 행위를 했으니 구원을 달라는 댓가가 있는 구원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가 이 성경에 의한 구원론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치니 로마카톨릭이 무너지고 산업혁명과 근세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발전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합리적인 돈독이 오른 개인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농노가 브르주아로 대표되는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돈독은 어떻게 오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돈독이 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를들면 공장근로자에게 사장이 돈을 더 줄테니 야근을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야근을 더 할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에 독일의 농업자본가들이 들어간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폴란드는 자본주의가 덜 발달되었던 나라였고 농노의 시스템이 아직은 더 유효한 때였다.

그 때 독일의 자본가들은 생산을 더 늘려보기 위해 폴란드 농부들의 임금을 늘렸다고 한다.

현재의 눈으로보는 합리적인 돈독이 오른 개인은 당연히 야근을 해서라도 더 일을 해 돈을 더 벌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폴란드 농부들은 일찍 퇴근을 했다.

이유는 그전의 임금만 받으면 되니 굳이 일을 더 해서 더 많이 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돈독이 오른 합리적인 개인은 원래 봉건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러면 합리적인 돈독이 오른 개인은 어떻게 돈독이 오르게 되었는가?

여기서 자본주의의 보수주의 정신이 나온다.

보수 그러니까 가진것을 지키는 것을 보수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보수라하면 현재 한국에서는 교회를 다니는 개신교도 정도만이 이 말을 쓰는 것이지 정치인들을 보수 라는 말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보수의 개념은 바로 칼빈주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에드먼드 버크 등 영국의 보수주의를 만든 정치학자 등이 더 발전시켰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니 진보니 이런 자들은 없고 그냥 좌와 우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좌파, 우파 이런식으로만 불러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론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지었고 그로인해 원죄라는 것을 얻었다.

그래서 인간은 죽으면 당연히 지옥으로 간다.

그렇다면 지옥으로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구원론이 나온다.


위에서 말한 로마카톨릭과 유대인의 할례당율법과 마르틴루터의 구원론은 다르다.

로마카톨릭과 유대인의 구원론은 행위구원으로 외면에서 나온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 열심히 나오고 세례, 고해성사 등등을 열심히 하면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이런 외면적 행위가 아니고 바로 내면에서 예수님을 믿어야 오직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캘빈은 더 나아간다.

내면의 믿음으로도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믿어봐야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명부에 벌써 구원받을 사람이 다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캘빈주의의 교리이다.


그러면 현재 살아가는 캘빈주의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죽고 나서 천국간다는 보장도 없고 현재를 염세주의자처럼 살면서 아주 근검절약하며 즐기지도 못하고 영원한 미결수처럼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이런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도구로서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을 열심히 행할 때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소명의로서의 적업의식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직업을 열심히 할 때 하나님의 도구로서 살아가니 마음의 안식은 찾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얘기다.

그러면 돈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들은 돈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돈이 자신의 직업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면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로 잘 쓰였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고 그로인해 돈이 많이 모이는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합리적인 돈독이 오른 근대적인 개인이다.

즉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보수주의 정신은 이러한 청교도적인 삶을 지키는 정신을 말한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안 좋은 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빈부의 격차이다.

그러면서 맑스의 공산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왜 공산주의가 시작 되었는가?

이것도 구원론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근대적 개인이 청교도적인 삶을 살면 자유와 평등한 사회가 펼쳐진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한 세상이 펼쳐 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맑스는 던진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오히려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자본가들만이 돈을 더 많이 벌어 현실은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게 되어 독점적인 자본가들이 아주 수가 적어지고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노동자)들이 착취를 받는 세상이 오면 프롤레타리아들이 혁명을 일으켜 자본가들을 없애고 노동자의 세상이 온다는 얘기를 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소련이 망하면서 이러한 논리는 말도 안 되는 허상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 온전히 공산주의를 하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없으며 전부 자유 시장경제를 도입했고 지배체제만이 공산당 일당독재를 하는 중국이나 신정체제를 유지하는 북한 등이 있을 뿐 자유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왜 공산주의는 시작되었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자본가들만 잘 사는줄 아는데 사실은 노동자들도 잘 살게 된다.

빈부의 격차는 벌어지지만 사실은 자본가들이 훨씬 더 돈을 많이 벌 뿐이지 노동자들도 굉장히 잘 사는 것은 맞다.


우리나라의 임금수준은 어느정도 수준일까?


글로벌 리치리스트라는 사이트이다.

http://www.globalrichlist.com/


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한국을 선택하고 자신의 연봉을 집어 넣어 보면 깜짝 놀랄 결과를 얻게 된다.


연봉 3000만 원이면 세계에서 몇 % 안에 들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0.97%이다.

만약 연봉 5000만 원이라면 무려 0.24%이며 이 사람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는 사람은 전세계 인구 75억명 중에 14백만 명만 있을뿐이다.


이것은 대학의 경제학자들도 실제 자료로 쓰는 신뢰도 있는 사이트이다.

즉 돈을 많이 벌기는 하지만 주변과 비교해서 못 산다는 것이지 절대적 빈곤이라는 뜻은 아니다.


근대적인 개인은 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포기했나?

바로 1929년 대공황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포기했다.

이 전까지만하더라도 근대적인 개인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면 현실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이 올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과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대공황으로 개인은 대공황으로 취업을 할 수 없었고 전쟁으로 인해 수 없이 학살되어지는 고통을 맛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자유 이런 것은 엿 바꿔 먹을 수도 있다고 봤다.

단지 취업만 된다면 말이다.


예를들어 내게 10억 원을 주고 평생 투표권을 빼앗는다면 어쩌겠는가?

아마도 거의 대부분은 바꾸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개인의 자유보다 더 급한 것은 빵이고 빵을 줄 수 있는 직장이 더 급한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와 동시에 등장한 것이 바로 나찌즘, 파시즘이라는 민족주의다.


취직만 된다면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선거로 독일의 통치권을 넘겨 받았고 그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독일국민에게 공통의 적을 만들었다.

바로 유대인과 제국주의다.

그래서 모두 독일국민을 취직시켰다.

물론 직업이 없다면 군수공장에 취직을 시켜 무기를 생산하는 일을 만들었고 군인으로 입대를 시켰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빈자리를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메웠고 그다음이 극우민족주의(전체주의)가 메웠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전체주의로 빠지게 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되는 일이 없다.

취직도 안 되고 장사도 안 된다.

열심히 일은 하지만 잘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엎어버리고 싶은 것이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심정일 것이다.

그것은 100년전에 서양에서 벌어졌던 일이고 현재 우리사회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심리를 모르면 아무리 자본주의가 좋다고 얘기를 해도 이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그 심리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 따위는 빵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돈을 많이 벌면 자유와 평등은 엿 바꿔 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심리를 모르고 자유 민주주의가 어쩌고 자유 시장경제가 어떻고를 얘기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조금 잘 해주는 정당이 있다면 그쪽으로 몰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는 더 큰 근본적인 단점이 있었기에 존속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전체주의의 근본적인 단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성장에 대한 대안이 없어서 실패한다.

자본론을 쓴 맑스도 프롤레타리아 공산혁명으로 공산주의 사회가 된 이후 공산주의가 어떻게 성장을 하여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성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작은정부를 통해 거래의 효율성을 높이고 개인의 인센티브를 높이며 자본으로 동기를 부여해서 열심히 일하고 혁신하면 잘 살 수 있는 믿음을 준다.

그러나 그 외의 체제는 이러한 성장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없고 일단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으로 나왔고 결국 자본주의와 기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없어지면 결국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를 택하지 않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를 보았는가?

중국은 자유시장경제를 택하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물건을 팔아 부국으로 갔고 북유럽의 나라들조차 세금을 70%까지 걷는 극도의 사회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같지만 정부는 자유시장경제를 하는 자본가들에게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고 그들이 하고픈대로 사업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나 이들도 복지를 강조하다보니 예전의 북유럽이 아니고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이들이 누린 복지는 선조에게 받은 유물로 버틴 것이고 인구가 수백만에 불과하기 때문에 석유로 복지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북유럽도 복지는 한계에 달했고 서서히 좀더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인구가 많은 나라중에 북유럽처럼 하는 선진국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이들이 아주 특수한 자본주의를 행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어떤것이 단점인가?


개인이 일할 동기가 없는 것이 바로 최악의 단점이다.

개인이 일할 동기란 우리나라 헌법에서 보장되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말하는데 그것을 사회주의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잘 산다.

왜냐하면 이들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등을 통해 한곳에 국력을 한쪽에 집중시켜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력의 투입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이라 어느정도가 지나면 한계를 드러낸다.

이것은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이다.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인센티브와 혁신이 없다.

그래서 소련의 스탈린도 자신들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도 해봤지만 실패하였다.


1930년대 소련은 중앙에서 계획을 하고 목표량이 달성되면 상여금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은 부작용이 있다.

상여금을 받는 순간 다음부터는 목표금액과 상여금을 합한 금액이 시작점이 된다.

출발점이 더 앞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는 죽도록 일을 해봐야 본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금방 이러한 단점을 알게 되고 오히려 일을 덜 해서 출발점 자체를 낮춰 놓은 다음 상여금을 매번 달성하는 식으로 일을 설렁설렁 하게 된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 수록 더 죽어나는 구조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단점을 시장에서 물건이 많이 팔리면 돈을 더 많이 버는 구조로 해 놨기 때문에 일을 설렁설렁 했다가는 굶어죽기 딱 알맞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러한 점이 일을 열심히, 혁신적으로 모험을 택한 사람에게 보상을 해주기 때문에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간의 차이가 더 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산주의는 시장이 없기 때문에 무작정 많이 생산을 하면 공급과잉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안 좋다.

철판을 만드는 공장에서 철판을 밤샘해서 무한대로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 조선업황이 안 좋아 배를 안 만들어도 되는 시장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시장에서 쓰이지도 못할 철판을 쌓아 놨다가 쓰지도 못하고 녹만 스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장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야지 국가가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면 중국처럼 과잉생산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센티브를 통한 생산성의 향상은 워낙 물건이 없는 아주 후진국에서는 혁신적으로 빠른 생산능력을 통해 발전이 가능하나 그 다음부터는 지속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


예를들어 농민이 농사를 짓는다.

처음에는 사람이 농사를 손으로 모를 심고 낫으로 벼를 벤다.

그리고 콤바인 트렉터를 통해서 기계화 영농을 하면 생산성이 높아진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바로 드론으로 농약주고 씨 뿌리고 인공지능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조절하는 방식이 있다.

그 다음에 생산성을 향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애초부터 콤바인, 트렉터와 같은 농기계 그리고 드론과 같은 신기술 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창작물이다.

공산주의 사회는 노동력만 쥐어 짜다가 생산량이 고꾸라지는 것이다.

게다가 공산주의 사회는 체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통제를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 질서에 들어오기 힘들고 자국의 폐쇄적인 조선시대의 농업 같은 것만 하다가 결국은 생산성이 떨어져 망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는가?

바로 감시와 처벌로 간다.

생산성이 늘어나지 않는 것은 당의 혁명정신이 부족하다고 몰아부치는 것이다.

그래서 총살을 하고 수용소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은 가능하다.

또는 사탕수수를 키우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을 노예제 공업과 농업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반도체를 만드는 연구원은 불가능하다.

노예를 데려와서 채찍으로 수 십차례를 때린다고 그가 5나노의 반도체를 설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아이폰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은 자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 하에서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권리를 주어야만 가능하다.

소위 합리적인 돈독이 오른 근대적 개인만이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생산성 향상을 이루는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청년은 왜 사회에 불만이 많은가?

바로 우리나라가 100년전 1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독일과 같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어느 나라나 다 겪는 일이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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