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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스펙, 외국에서 알아주더라… 해외 취업자 수 1

열정·스펙, 외국에서 알아주더라… 해외 취업자 수 1607명→5783명



해외 일자리 찾는 젊은이 급증


"아무 스펙 없는 제가 한국에서 어떤 미래를 살게 될지 얼추 예상이 됐어요."

호주의 한 레스토랑에 셰프로 취업한 이윤상(31)씨가 한국을 떠나 해외 취업을 결심한 이유다. 이씨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졸업하지 못하고 한국에 왔다. 편입을 준비해 대학에 간다 해도 졸업하면 서른을 넘길 것 같았다.

이씨는 뒤늦게 스펙 쌓기에 뛰어드는 대신, 호주로 건너가 휴일도 없이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요리 수업을 들었다. 셰프 자격증을 딴 뒤 이력서를 돌렸다. 열심히 면접 보러 다닌 끝에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자리 제의가 왔다. 이씨는 "(국내에 머무는 대신) 호주에 가니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서 "주 50시간 일하고 월급을 300만원 받고 있어 놀랍고 감사하다"고 했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이 27일 해외 11개국에 취업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해외취업 성공수기집'을 발간했다. 한국 취업에 올인하는 대신 해외로 눈을 돌린 이들이다.

윤희경(28)씨는 지난해 일본의 한 종합 건축회사에 취업했다. 처음부터 일본 취업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지방 국립대 졸업 후 해외 교환학생도  가고 봉사활동도 했다. 일본어·중국어·영어 성적도 남 못지않게 올렸다. 하지만 원하는 곳엔 죄다 떨어졌다. 그러던 중 해외 취업  전문회사에서 "일본 기업에 취업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이 왔다. 기회가 생긴 것이다.

지난해 도쿄의 한 온라인 쇼핑몰에 정규직 웹디자이너로 취업한 여선향(26)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졸업 후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계약직이었다. 여씨는 "정규직 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 일본 취업을 결심했다"고 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2013년 1607명이었던 해외 취업자 수는 지난해 5783명으로 크게 늘었다. 정부가 주관하는 해외 취업 연수에 참여하는 구직자 수도 같은 기간 2배 넘게 늘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7/2019022700261.html    



왜 20대보고 해외로 나가라고 한다면 싫어할까?




도망치는 것 같아서일까?


아니면 남하고 비교를 할 때 내가 못해보일까봐서일까?




한국은 현재 지옥의 취업난을 겪고 있다.


아마도 10년 정도 지나면 40만 정도 태어난 이들이 취업전선에 나서기 때문에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의 양질의 일자리와 청년이 미스매치되고 있다.


뽑는 곳은 현저히 적은데 들어가려는 이들은 많은 구조라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잘 된다는 것도 현재의 일자리를 보존했을 때라는 가정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 그리스처럼 몰락한다면 인구가 줄어드는 것과 관계없이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성과 끊임없는 비교 때문에 불행해진다 했다.


현재는 실존이고 실존은 불행을 만들며 불안에서 그 불행이 온다.


왜 불행할까?


남과의 비교다.


행복도 남과의 비교에서 온다.




행복하다는 것은 남과 비교해서 행복한 것이고 불행도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불행해진다.




또다른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남의 비교를 통한 행복은 휘발성이 있고 남과 비교를 통한 불행은 영원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남은 영원히 무한한 존재니까 말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에 갇혀있는 인간은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직시라고 했다.


직시를 통해 불안이 떨림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직시를 통해 나를 봐야 한다는 말 아닌가 싶다.




남과 비굘르 통해 불안해지고 불행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남은 내가 알 수 없는 존재고 무한한 존재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직시는 편안해진다.


왜냐하면 남은 나를 알지 못해도 나는 나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매일 전교 2등을 하는 학생이 있었다.


1등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1등이 강력했다.


항상 점수가 잘 나왔다.


그래서 그 학생을 따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5시간 공부하면 5시간을 공부하고 수학참고서를 사면 따라 샀다.


쉬는 시간에 공부하면 쉬는 시간에 같이 공부를 했다.


그러나 다시 시험을 봤지만 1등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원인을 알았다.


전교 1등을 따라했기 때문이다.


내가 남을 따라했지만 사실 그가 얼마나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완벽히 따라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외부의 문제가 아닌 내부의 문제로 사건을 바라봤다는 것이다.




시험이라는 것이 다 맞추면 100점 아닌가?


틀리지 않으면 100점을 맞는 것이다.


틀리지 않고 100점을 맞으면 1등을 하는 것이다.


만약 전교 1등도 100점을 맞으면 공동 1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틀리는 것이 없도록 만들면 최선을 다한 것이고 그 이상은 하늘에 맡기면 된다.


그 후 불안에서 벗어나 편해졌다.



남과의 비교를 벗어던지고 내 머릿속에서 타성을 벗어 던지니 비로소 불안이 떨림으로 바뀌었다.

왜 떨림으로 바뀌었을까?

공부를 할 때 이렇게 자신이 온전히 최선을 다했을때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드디어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불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과거는 그 때는 행복했지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그리고 불안한 미래를 사는 현재는 불행하다.


그러나 불안을 떨림으로 바꾼 자는 미래가 불안하지 않고 기대가 된다.

그리고 현재는 최선을 다하니 행복하다.


스스로 행복한자는 남과의 비교를 통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고 최선을 다함으로서 행복해진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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