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일하기

by 환상수첩


모든 글 쓰고 싶은 자의 꿈은 전업작가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산책을 하고 오전에는 글을 쓰다가, 점심을 만들어 먹고 독서와 운동을 하는 삶. 때로는 그리스 산토리니로 때로는 헤밍웨이가 저녁을 보냈다는 쿠바의 카페로 떠나서 글을 쓰는 삶.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렇게 살고 있다. 글만 쓰고 노동하지 않는 삶, 정확히 말하자면 글을 쓰는 것이 곧 노동이 되어 양식을 벌어다 주는 삶은 상상만으로도 저릿한 행복을 준다.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전업작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진심으로 매일매일 로또를 사는 것이 더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글 쓰고 싶은 자의 꿈과 달리, 현실은 고달픈 노동의 반복이다. 매 월 같은 날, 같은 일련번호의 통장에 7자리의 숫자를 찍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 가장 먼저 내어주어야 하는 것은 눈동자의 빛이다. 약간은 바보 같은, 창의성보다는 규칙성을 느낄 수 있는 눈이 최상품이다. 불합리한 문화를 견뎌야 하고 술을 마셔야 한다. 야근을 해야 하고 야근을 하면서도 아침에는 기계처럼 일어나야 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글 쓰고 싶은 자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자의 현실보다 몇 배는 더 고달프다. 이들은 이를테면 경찰서에 들어가서 강도 짓을 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체포당할 것을 뻔히 알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이들에게는 혹시 수감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설렘조차 없다. 피카소를 꿈꾸는 사람이 평생 엑셀을 만지작거리며 살아가야 하는 절망감이다.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철저히 반-예술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 앞에서, 모든 글 쓰는 사람은 괴롭다.

그러나 나는 그 괴로움으로부터 오히려 예술을 발견한다. 겪어야 할 모든 재난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속으로 뛰어드는 모순에서 말이다. 이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혹은 늙어버린 부모나 미래의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예견된 불행을 선택하는 매일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노동하는 기계로 전락한 인간의 운명을 슬퍼하는 펜에서 예술이 시작한다면, 그러한 비판을 끝내는 즉시 펜을 던져두고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 회사로 출근할 때 예술은 완성된다.

결국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고, 한 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먹여 살려야 할 몸뚱이의 운명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절박한 인내를 마주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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