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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Oct 22. 2021

외롭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사람들

BCN 〰 DUB. 05

2020

0228

Day4.




바르셀로나 근교에 있는 몬세라트와 시체스 투어가 있는 날이었다. 일일투어다 보니 일정이 꽤 빠듯했다. 아침 7시, 현지 사람들이 출근하는 시간보다 빠르게 나가는데 텅 빈 거리가 상당히 스산했다. 거기에 찬 바람까지 부니 지난밤에 이 거리를 유랑했던 쓰레기들이 제멋대로 나뒹굴었고 새벽녘 추위를 피해 자리를 잡는 노숙자들이 적잖았다. 괜히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이어폰을 꽂고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그런데 나와 마주 보며 걷던 남자가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디스 이즈 코로나!"를 (아주) 큰 소리로 외쳤다. 순간 뒤통수부터 서늘해졌지만 거리엔 다행히(?)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시한 채 걸음을 서둘렀다.






Urgell역에서 5회 정도 더 남은 T-Casual을 개찰구에 넣었는데 이상하게 계속 티켓을 도로 뱉기만 했다. 넣었다 뺐다를 하고 보니 잔여 횟수를 볼 수도 없었을뿐더러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되어버렸다. 결국 11.35유로를 주고 새 티켓을 구매해 자연스럽게 에스파냐 광장 쪽으로 가는 L1메트로를 타고 내렸다. (다음 날이면 바르셀로나를 떠날 거라 잔여횟수가 많이 남은 이 티켓을 어쩌나 하는 생각도 했다. 결국 아무에게도 양도하지 못하고 기념품으로 소장하게 되었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익숙한 듯 잘 다니고 있는 줄 알았다. 새로 산, 이제 막 한번밖에 쓰지 않은 T-Casual을 개찰구에 넣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부터 어딘가 이상하고 어색한 공기를 감지했다.


내가 걸었던 그 출구가 분명 맞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느낌이 조금 쎄하다 싶어 구글맵을 켰다. 내가 서있는 곳 주변에는 ZARA와 OYSHO가 있었다. 역시 이상한 게 맞았다. 에스파냐 국립미술관이 아니라 나는 카탈루냐 광장 가운데에 서있었던 거였다. 추운 와중에 식은땀이 나며 다시 재빠르게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내려갔다. 그때가 투어 미팅 시간까지 15분이 남아 있었다.



여기가 에스파냐 광장인데...어떻게 카탈루냐 광장이랑 헷갈릴 수 있지



마침 출근 시간이 겹쳤고 지하철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초조함과 불안한 마음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미팅 5분을 남겨놓고 에스파냐 광장에 도착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연인, 아들과 엄마, 딸과 엄마, 그리고 혼자 온 여자와 남자들. 그렇게 30명이 넘은 인원이 함께 큰 전세버스 1대로 움직였다.


몬세라트에 도착해 주어진 자유시간에 사람들은 흩어지기 전 혼자 온 사람들끼리 하나 둘 짝을 짓고 있었다. 트래킹 코스가 있는데 함께 가지 않겠냐, 커피 마시면서 함께 시간을 때우자 등등... 다들 덜 외롭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선택받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카탈루냐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고지대라 더 더 추웠다.



가이드가 몬세라트에 오면 꼭 해야 하는 게 있다고 했다. 바로 검은 성모상이 이곳 성당에 있고, 그 검은 성모상이 들고 있는 구슬에 손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아주 잘 이루어질 거라는 거였다. 본인도 몇 해 전 그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이렇게 스페인에 와서 잘 살게 되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기도빨'이 아주 잘 드는 곳이니 꼭 구체적으로 빌 소원들을 미리 생각해두라고. 검은 성모상을 보기 위해 차례로 줄을 서서 성당으로 들어갔다. 줄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점점 사람들이 하나둘씩 줄어들었고 계단의 끝에 닿아서 그냥 지나가는 곳이다 했는데 그곳에 검은 성모상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공간에 그 성모상이 있었고 어쨌든 올라왔으니 소원은 빌어야 하는데 너무 갑작스러워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었던 소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구슬에 손을 올리고 잠시 멍해 있다가 "모두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는 들어주기도 애매한 소원 같은 걸 빌고 내려왔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준비된 돈을 지불하고 소원 초를 켜는 곳인가 보다



구슬에서 손을 떼고 내려오는 내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생각했던 소원은...

'길을 잃지 않고 좋은 사람들 만나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였다. 그런데 하나님도 들어주기 애매모호한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는 걸 소원 따위로 빌다니. 아쉬움과 허탈함으로 터덜터덜 성당을 걸어 내려갔다. 사람이 별로 없는 수도원 담벼락 뒤쪽으로 가 계단에 기대어 앉았다. 그곳에는 남자가 담배를 아주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싶었다.


나는 뭘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없지만 소원을 비는 것조차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도 '나도 나다'라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쭈굴쭈굴하고 찌질한 그런 거.






수도원 근처 카페테리아에서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시켜두고 마음을 다졌다. 사실 다질 것도 없지.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소원을 다시 빌기 위해 1시간이 넘는 대기줄에 합류할 순 없었다. 내가 이렇게 간절한 사람이었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무언가에 이렇게도 절실했었을까 싶었다. 아니, 그건 어쩌면 다시 올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이드의 몇 해 전 소원대로 스페인에 다시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빌 걸 그랬다.


카페에 앉아 한국시간을 확인했다. 한국은 저녁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후배는 잘하고 있을까, 팀장님들은 내가 정리해 보내준 자료들 잘 보고 계실까, 어려운 건 없을까.'를 생각했다. 분명 퇴사한 게 맞는데, 왜 퇴사를 해서도 일을 걱정하고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을까 싶었다. 퇴사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존재가 잊혀질까 그게 두려웠던 걸까. 왜 14시간이나 떨어진 낯선 곳에서 조차 손에 쥐고 놓지 못하고 있을까.


그러다 문득, 몬세라트에 도착해 동행을 찾고 짝을 짓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사람들. 그건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마음이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일'을 머릿속에서 밀어내지 못하고 계속 걱정하고 일부러 반복 버튼만 눌러대는 것. 이젠 멈춰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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