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일기 09.
나는, 내가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최선’이라는 기준 또한 지극히 상대적인 거긴 하나 내 기준으로선 그랬다. 최선을 다 한다고,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만나서도 요즘 뭐해? 요즘 어때?라고 물어오면 “열심히 일했어.”라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열심히 했다는 것 또한 상대적이긴 하나 그래도 나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과정은 모두 똥이 되는 거긴 하지만. 그 최선을 다 했다는 과정과 나만 남는 거다. 결론이 폭망이라면 더더욱.
사실 폭망이 맞긴 하다. 나를 믿었던 사람은 내가 꽤 도전적인 퍼포먼스 마케터라 생각했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게 된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려야 하는 지하철 정거장을 지나쳤다. 나는, 그럼 뭘 잘하지?라는 생각이 나를 계속 아프게 했다. 그 생각은 내 손가락을 깨물기도 했고, 내 귀를 뜯기도 했고, 종아리를 쓰라리게 했다. 말 그대로다. 아팠다. 나를, 어떤 한 구석을 믿고 함께 일하자고 한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지구 상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을 많이 미워하고 사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일 뿐만 아니라 나는 사랑도 열렬했다. 단 한순간도 마음을 다 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래서 늘, 이게 문제다. 상대에게 스며들고, 물들고, 온전히 내 삶을 상대의 삶에 다 바치며 산다는 거. 그래서 버리는 법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랑하는 마음을 다 안고 가버리기 때문에 버릴 줄을 모른다. 애석하게도 그 결말은 반대로 처절하게 버려지는 거지만.
뭔가, 계속 버려지는 기분이었어. 어떤 관계에서도 난, 한 번도 먼저 떠난 적이 없어. 늘 상대가 먼저 떠났지.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나한테 문제를 찾는 게 너무 괴로우니까 다 개새끼로 만들었던 거야. 근데 당신은, 처음부터 결심하고 만난 거니까. 더 이상 개새끼 수집 작업은 하지 않겠다. 잘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줄 거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당신이 미워질 것 같으면 얼른 속으로 빌었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기를, 근데 난 불행하니까, 욱해서 당신을 욕하고 싶으면 얼른 ‘정찬혁 개새끼’.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어디다 화풀이를 해야 될지 모르겠을 때마다 ‘정찬혁 개새끼’. 그러다가도 문득, 그놈이 돈을 다 갚으면 난 누구를 물어뜯지? 돈을 다 갚을까 봐 걱정해.
_나의 해방일지, 16회 중
내가 무너지지 않고 간신히 버티고 설 수 있던 건 사랑과 일이었다. 그마저도 위태로웠고, 결국 그 우려대로 꺾여 버리긴 했지만. 미정이의 대사처럼 나를 떠나는 상대를 보며 나에게서 문제를 찾은 게 너무 괴로웠다. 최선을 다 하는데, 나는 뭐가 문제인 걸까를 계속 떠올리면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방향을 잃고, 깊이 추락하는 기분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이전에는 아주 명확했는데, 요즘은 그 살아야 할 이유조차도 잘 모르겠다.
지난 주말에는 하염없이 길을 걸으며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생각했다. 방향을 잃고 텅 빈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한강 다리를 올라야 할까, 연탄을 태워야 할까, 몸을 갈기갈기 찢어야 할까. 아무리 살 이유를 찾아도 그럴 만한 이유 같은 게 없었다. 그러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집에 돌아와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데 늙은 우리 집 강아지가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채로 이리 쿵 저리 쿵하며 내게 다가오는데 그 모습에 소리 내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늙은 아치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아치가 내 옆에서 아프지 않고 편하게 눈 감을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기한을 정해놓기로 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중이다. 나는 분명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하여금 함께 빛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 생각도 허황된 것 같다. 그 생각마저 공허하다. 빛이 나는 건 뭘까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