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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병과 회복에 대한 조각글들

by 조제

1. 나는 조울증 환자이다. 약먹은지 몇년이나 되었고 조와 울의 사이에서 살아왔다. 매년 가을이나 겨울이면 울증삽화가 심하게 와서 힘들었다. 그런데 작년부터인가 심하게 오던 울증삽화가 매운 맛이 좀 줄어들어 순한 맛(?)으로 오기 시작했다. 추워지면 몸도 춥지만 마음이 안 좋아서 힘들었는데 이제 그게 좀 줄어든 것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의 영향력 아래에서 힘들었는데 너무 반가운 일이었다. 근데 정신병의 세기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내 생활습관도 바뀌는 건 아니었다. 힘드니까 집안에만 있던 것, 낮잠을 자는 것, 활동을 잘 안 하는 것 등의 습관이 내게 있다. 이제 더이상 예전 만큼 힘들지 않는데도 오래된 습관에서 나와 조금더 활기차게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씩 조금씩 새롭게 나아가보고 싶다. 내인생을 살고싶다.


2. 요즘 보통의 기분이 우울하지 않고 평온해서 그걸 느낄 때마다 놀란다. 나는 어릴때부터 보통 우울하거나 불안하게 지냈던 것이다. 심리치료를 받아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그건 우울해지는 기분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법을 배운거지 보통 상태의 기분이 자연스럽게 좋지는 않았다. 비유하자면 시력이 안좋아서 안경을 쓰다가 라식수술을 해서 눈이 완전히 좋아졌을때의 기분 같다.

물론 사람인이상 우울이나 불안을 또 안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좀 달라진게 내 디폴트 기분은 평상심이라는 것이다. 우울했어도 불안했어도 감정을 소화시키면 다시 평온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마음이 힘들었기에 자신감있게 말하기는 좀 두렵지만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3. 알바하고 영어공부하고 다이어트 식단 먹고 그렇게 지내고 있다. 근데 지금 이렇게 별일없이 지내는게 내겐 참 별일이란 걸 시시때때 느끼면서 살고 있다. 우울하지도 불안하지도 않고 죽고 싶지도 않은 것. 그것이 참으로 별일이다.

이런 일상을 만들기 위해 나는 십 년 정도 노력해온것 같다. 정신과에 다니고 심리상담을 받고 트라우마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책을 읽고. 힘들면 좀 쉬어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그래, 그랬다. 지금의 평온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이다. 도움을 준 분들도 물론 많았다. 그래도 내가 인생의 방향을 잡고 있었기에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고생했다, 나여. 내년에도 잘부탁해.

4. 행복한 날에는 자기 싫었다. 자고 일어나면 행복도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다시 우울한 내가 되있을것 같아서. 실제로도 우울삽화 심할땐 그랬고. 하지만 이제 또 좋은 다음날을 위해 일찍 자기로 했다. 나의 행복과 평온은 자고난 후에도 그대로 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안그래도 다시 올테고. 황인숙이 '슬픔이 나를 깨운다'에서 언제나 슬픔이 나를 기다린다고 한것처럼, 이제 내겐 평온이 나를 깨우고 기다리길. 그렇지않더라도 이겨낼수 있는 내가 되길 빈다.

5. 정신과에 갔는데 의사샘이 이제 한달에 한번만 와도 되겠다고 했다. 정서도 안정되고 생활도 괜찮다고. 너무 기뻤다. 처음 이 병원에 왔을때가 2018년 이었던가.

일주일에 한번씩 왔고 와서 얘기하다가 힘들어서 울기도 많이 했다. 그땐 이런 날이 올줄 몰랐는데 5년이나 걸리긴 했지만 이런 날이 왔다. 집에 오는 길에 모든게 왠지 다 감사하게 느껴지고 기뻤다. 병원에 갈 수 있게 걷는 다리가 고마웠고, 길을 보는 눈이 고마웠다.

쌀쌀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마저 날 위해 춤춰주는 것 같았다. 내게 삶은 고통 속에 잠시의 기쁨이 있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기쁨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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