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난로 양말 대신 하얀 누비 버선

버선발로 불운을 쫓고 있습니다

조선빈티지 누비버선 오너먼트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모아둔 박스를 연다. 지난 1월에 닫아둔 테이프를 거칠게 뜯고, 세월 가는 일에 성실했던 먼지들도 털어낸다. 얌전히 정리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흐트러진 모양새를 보니 작은 상자 안에서도 1년은 꽤 묵직한 시간이었나 보다.

손끝에 작은 양말 오너먼트가 한 줄에 꿰여서 나온다. 처음 만든 사람이 작은 양말에도 신경을 많이 썼는지, 뜨개질 조직이 두 해째 여전히 튼튼하다. 작은 트리 장식에 맞춘 오너먼트라서 양말에는 겨우 손가락 하나만 우습게 들어간다.


외국 영화의 크리스마스에는 벽난로 위에 빨갛고 하얗고 초록빛이 섞인 여러 개의 양말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다. 가끔은 아이 몸통만 한 양말에 선물을 담아두는 장면도 있다. 선물 포장으로 삼기에도 양말은 그리 편안한 구조가 아닌데, 무슨 의미로 저런 장면이 되풀이되는지 늘 궁금했다. 그러나 ‘충분한 궁금증’은 아니었는지, 크리스마스 때만 잠깐 떠올렸다가 새해가 되면 곧장 잊어버리는 나쁜 버릇 탓에 성탄절 양말에 관한 숙제는 오랫동안 미뤄져 있었다.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아버지와 세 딸이 살고 있었다. 옹색한 살림 탓에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온 가족의 슬픔이었다. 지참금을 준비하지 못하면 결혼할 수 없었던 괴이한 풍습은, 세 딸을 잘 길러낸 아버지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느 딸에게도 지참금을 줄 수 없었던 딱한 사정은 우연히 성 니콜라오스에게 닿았다.

그는 밤에 몰래 금주머니 세 개를 들고 와 창문(또는 굴뚝)으로 던졌는데, 마침 난로 옆에서 말리던 양말 속으로 쏙 들어갔다. 상상조차 못 했던 성인의 선물에 가족들은 크게 기뻐했고, 세 딸은 무사히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덧 산타클로스 역할까지 맡게 된 성 니콜라오스는 전설과 함께 커다란 양말 주머니를 들고 다니며,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가장 바쁜 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밀어두었던 양말 숙제를 비로소 마무리했다.


양말 대신 버선을 신는 이 땅에서도 하얀 버선은 오래도록 제 역할을 다했다.

옛 어머님들은 가족들의 버선을 직접 지었다. 식구마다 발 사이즈가 모두 다르니 버선도 그에 맞춰 별도의 본을 만들어두었다. 해마다 자라는 아이의 발 버선본도 꼼꼼히 챙기기 위해 ‘버선본집’이라는 주머니를 따로 만들어 두었다. 아이에게 좋은 기운이 가득하라고 길상문을 한가득 수놓은 버선본집을 사진 속 자료로 만날 때마다, 농사짓고 살림하던 그 바쁜 어머님들이 호롱불 아래에서 자수까지 놓느라 얼마나 밤잠을 설쳤을까. 이름도 얼굴도 본 적 없는 여인들의 수고스러운 일상이 절로 아리다.


넉넉한 처자들은 혼인 전에 자신들이 평생 신을 버선을 모두 친정집에서 지어 가기도 했다. 새로 지은 버선 한가운데에 색실로 깊게 십자수 모양으로 바늘땀을 떠서 한번도 신지 않은 버선이라 표시해준다. 부자집 아가씨들은 백 켤레의 버선을 준비해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한 생애가 마칠 때까지 자신의 버선을 모두 소비하지 않아서 색실로 깊게 새긴 십자수 바늘땀은 21세기에도 단단하게 옛 주인의 버선을 지키고 있다.


한 켤레의 버선을 손바느질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나는 과연 부자집 아가씨가 자기 버선 몇 켤레를 바느질 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곤 한다. 본래 혼례에 관련한 바느질은 혼례 당사자가 하지 않았던 풍습도 있으니 백 켤레의 버선 단 한 조각도 자신이 바느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괜스레 부아가 난다.


버선에 쓰이는 원단은 매우 튼튼해서 바늘 한 땀 한 땀 꽂을 때마다 천의 저항을 손가락으로 온전히 느껴야 한다. 중간에 솜이라도 넣어서 누비 버선을 지을 때면 손가락 끝에 몇 번씩 핏물이 맺히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하얀 원단에 핏자국이 스밀까 매우 예민하게 작업해야 한다. 그저 발에 신은 옛날 양말일 뿐인데 큰 병풍 만드는 일만큼 마음을 많이 써야 한다.


버선은 보통 옥양목을 자주 이용한다. 맨바닥에 오래 스쳐도 튼튼하고 여러번 세탁해도 틀어지지 않는 믿음직한 면 원단이다. 시간에 따라 부드러움도 더해지니 버선짓기에 알맞은 재료다. 하얗게 지었던 버선은 일상을 견디며 바늘선들이 헤지고 눈같이 하얗던 자기 색을 잃은채 자연스러운 소색으로 변한다.


하얀 버선에 대한 옛 어른들의 믿음은 여러 풍습을 만들었다. 음기가 가장 깊은 날이라 여겼던 동지에는 어른들의 건강을 해칠까 두려워하며 버선을 짓접 지어 부모님께 신겨드렸던 동지헌말이라는 풍습이 있다. 또한 집안 살림의 중심이었던 장독대에는 버선 모양을 하얀 종이로 만들어 버선 입구를 아래로 향하게 하여 장독대에 붙여 놓는 풍습도 있었다. 실용적으로는 밝은 빛이 반사되어 장독에 기어오르는 벌레들을 쫓았다고도 하고, 악귀나 액운들이 장독대를 타고 오르면 버선 입구로 들어가서 버선에 빠뜨리고 장독에는 좋은 기운만 남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는 하얗고 작은 버선을 크리스마스 소품으로 준비한다. 잔누비가 일렬로 안정감 있게 배치된 원단을 고르고 버선본을 다듬는다. 실제로 신는 버선이 아니라서 수눅의 맵시에 한껏 공을 들였다. 버선코에는 비단실로 잔술을 만들어서 코끝을 날카롭게 세운다. 사람의 발 대신 목화솜으로 인심좋은 아낙마냥 채워준다. 넉넉한 솜 덕분에 회목도 부드러운 곡선으로 잘 이어진다. 버선입구는 꼼꼼하게 감침질로 막아서 작은 오너먼트를 완성한다.


얇고 가는 골드체인과 천일동안 푸르른 유칼립투스, 그리고 작은 마끈으로 무심히 이어주면 조선빈티지 스타일의 크리스마스가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 꼼꼼하게 막아둔 버선입구를 보니 어째 성 니콜라오스께서 던져주시는 금덩이도 제대로 못 받는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금보다는 복이지.

우리 공방 식구들 모두 겨우내내 편안하고 건강하게 새해를 맞길 바란다. 그저 그분께서 주시는 복이 작은 버선이 아닌 너른 마당 한 켠 가득 채운 장독마다 가득 가득 채워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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