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아랍왕실 돈도 다 받아보네
토요일 저녁 6시까지 꽉 찬 일주일을 보내는 공방들이 많다. 직장인들이 보통 토요일 수업을 듣기 때문에 공방수업은 남들 쉬는 날일수록 바쁘게 돌아간다. 일부 공방에서는 일요일 수업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같은 공방 주인장으로서 그분들의 에너지는 부럽기만 하다. 일요일까지 수업하는 날에는 초콜릿으로 수액을 맞아도 마지막 혈당을 쥐어짜 내며 어려운 하루를 마감한다. 마지막 수강생이 공방을 떠난 즉시 그 어떠한 업무도 손대지 않는다. 하얗게 불태운 한 주일이 끝났다.
바느질 선생은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고 또 수강생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줘야 하는 직업이라서 사람들한테 너무 소모되지 않도록 조절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말없이 지내는 시간이 있어야 다음 한 주일도 큰 실수 없이 평온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스스로 너무 지친 상태에서 회복 없이 새로운 주일이 시작되면 바느질이 서툰 수강생에게 곱게 말하지 않고 억양이 이미 무서워지거나, 예쁘게 완성되지 않은 내 바느질에 불같이 화내는 몹쓸 짓을 하게 된다. 그래서 소중한 일요일은 가급적 모든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는다. 다음 주를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다.
소중한 나의 일요일에 [부재중전화]가 계속이다. 5분 간격, 10분 간격으로 진동이 온다. 낯선 번호는 곧 일 이야기이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 모른 척한다. 일요일 아침부터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하루뿐인 나의 휴일이니 절대로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고, 바느질과 매듭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니 전화하는 누군가도 월요일까지 기다렸으면 좋겠다. 단호한 눈길로 휴대폰을 보는데 같은 번호가 반복해서 연락이 온다. 영 신경 쓰인다. 이쯤 했으면 그만할 법도 한데 지치지 않는다.
아, 이미 정신적으로 일하는 느낌이다. 다음 한 번만 더 울리면 전화받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마냥 친절한 홈쇼핑 콜센터 목소리로 받아주고 싶지 않다. 휴대폰을 째려보고 있는데 5분도 안돼서 다시 진동이 울린다. 살짝 날 선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조선빈티지인가요?”
“네. 일요일 아침에 무슨 일이시죠?”
“죄송합니다. 혹시 일요일에는 공방오픈을 안 하시나요?”
“네, 토요일까지 수업이 있고 일요일 수업은 없어요.”
“수업이 아니고 재료를 구입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근데 급한 일이라서, 일요일인데 꼭 지금 필요한 재료라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재료가 이렇게 급하게 필요하신가요?”
“매듭끈을 사야 할 것 같은데, 직접 보고 살 수도 있나요? 오늘 꼭 써야 합니다.”
서른 살쯤 됐을까 싶은 남자가 무슨 일로 매듭끈을 허겁지겁 찾는 것일까 갑자기 흥미로워진다. 젊은 남자 목소리는 연기톤이 아니다. 심각하다. 호기심은 귀차니즘도 이겨낸다. 날 선 목소리톤은 이미 라이브쇼핑톤으로 바뀌었다. 이번 일요일은 에피소드 적립데이다.
“어떤 종류의 매듭끈인가요? 저희는 주로 수업용으로 사용하는 끈들만 가지고 있어서 원하시는 매듭끈이 뭔지 알아야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직접 보고 살 수 있나요? 색깔이 중요한 작업이라서요.”
“색상은 60여 가지쯤 있는데 아주 대용량이 아니시라면 공방 오셔서 직접 보시고 결정하시죠.”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럼 오후시간에 연락드리고 뵙겠습니다. 블로그에 있는 주소로 가면 되나요?”
“네, 서울과 하남은 일요일에 수업이 없어요, 그리고 대전작업실에만 매듭끈이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지금 대전입니다. 좀 있다 뵙겠습니다."
늦은 오후.
삼십 대쯤 됐을까 싶은 남자 둘이 공방을 찾아왔다. 한눈에도 방송관계자 느낌이 물씬이다. 촬영장에서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옷차림과 분위기, 낯선 공간이라 어색해하면서도 곧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려고 애쓰는 모습까지 익숙하다.
“커피드릴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롤에 감겨 있는 끈들이 매듭끈이에요, 보고 계세요.”
장정 둘이 벌떡 일어나 샘플로 가져온 끈과 우리 매듭끈 컬러를 계속 확인한다. 경쾌한 터키석 컬러로 만든 양모끈이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매듭컬러와는 톤차가 있어서 조금 염려가 되었다. 둘이 열심히 고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 잠시 후,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오는 빠른 잉글리시! 카메라에 끈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더 맞느냐고, 저게 더 맞는 것 같다고, 양쪽에서 야단이다. 십 수년간 안 했던 영어 듣기 평가가 라이브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외국인한테 매듭끈까지 확인을 받으면서 일을 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장정 둘은 컬러 하나를 정한 것 같았다. 빠른 잉글리시 통화도 끝이 났다. 급한 일이 마무리가 된 것 같아서 넌지시 묻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랍 왕실에서 의뢰한 촬영을 진행하고 있어요.”
“???? 아랍 왕실요????”
특정왕실 이름이 나와서 크게 당황했다.
아니, 우리나라 전통매듭과 아랍왕실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낯선 단어조합에 동공이 빠르게 움직인다. 생활연기가 안 되는 나를 보고 PD님이 천천히 설명해 준다.
“아랍왕실의 미래와 관련한 영상을 만드는 중이에요. 과학기술과 미래 관련한 이미지는 한국 쪽에서 촬영하기로 했고 그 왕실과의 연관성을 매듭끈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이 매듭끈은 하나의 모티브가 돼서 스토리에 꼭 필요해요.”
촬영내용이라 세세하게 남길 수 없지만 대화 속에서 이 매듭끈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갑자기 나도 마음이 급해진다.
'그렇다면 우리 매듭끈도 손으로 직접 짠 매듭끈을 사용해야 했던 게 아닌가, 기계끈으로 촬영을 해도 되는 장면인가.'
순간 고민이 됐다. 지금이라도 다른 매듭공방에 터키석 컬러의 손끈목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전통매듭끈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컬러라서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연락은 후루룩 돌려봐야 할 것 같은데…… '한국의 전통'이 촬영 주제는 아니라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내일 당장 촬영에 사용해야 한다고 하니 현실적으로는 어렵겠다 싶기도 하고, 대화 내내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나 우리 공방 입장을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점은 직접 짠 손끈목 여부가 아니라, 그 영상이 한국에 들어오는지가 관건이다. 혹시나 저 영상이 한국에 들어오면 전통매듭 관련한 분들께 한마디 듣겠다 싶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계끈들은 취미로 만나는 전통매듭으로는 문제가 없겠지만, 전통매듭의 대표성을 띄는 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생을 다하며 전통매듭에 매진하는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몹시 주저했다.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매듭을 짓고 계신 분들이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우리가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앞서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아랍의 어느 나라와 우리나라, 양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촬영일정을 생각해 본다면 촬영팀 발목잡지 말고 빨리 만들어서 보내는 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업자적 마인드도 동시에 작동을 한다. 급한 것부터 묻자.
“저 영상이 한국에서 방송이 되나요?”
“아니요, 아랍왕실 내부에서 주로 활용될 예정이에요. 구성원들에게 앞으로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지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만드는 영상이니까요,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일은 없어요.”
“당장 내일부터 촬영소품으로 필요하신 거죠?”
“사실, 오늘도 필요했는데 어떻게 될지 몰라서 내일로 미뤘어요. 좀 많이 바빠요.”
“그럼 제가 고민할 시간도 없겠네요. 일단 일은 되게 하죠. 골라주신 그 매듭끈이 실제로 카메라 앞에 조명을 비추면 다른 컬러로 보일 수 있어요. 그 컬러랑 비슷한 두세 가지 컬러를 더 가지고 가셔서 카메라 테스트로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부자재를 사용하지 않은 매듭팔찌는 여러 번 착용하면 매듭끈이 풀릴 수 있어요. 여분으로 몇 개를 더 만들어 드릴 테니 촬영 중에 파손이 있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네요.”
매듭끈들 보내고, 샘플매듭팔찌들 이미지도 함께 보내고 두 장정도 보냈다. 나의 걱정은 촬영일을 잘 마무리 짓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보다 완벽한 매듭끈을 사용하면 좋겠지만 언제나 시간 맞춰서 일을 끝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 촬영 스케줄이 매우 빠듯하다고 다른 감독한테 피곤 섞인 목소리로 전했던 PD님의 스피커폰 영어 대화를 핑계를 삼아보자. 일하자!
매듭팔찌랑 매듭끈이 촬영장에 갔으니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 그 특별한 일요일이었구나 싶다. 평소대로 월요일 일정을 진행하려는데 익숙한 번호가 다시 화면에 뜬다. 순간적으로 가져간 매듭팔찌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서 냉큼 PD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PD님 매듭팔찌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문제는요, 부탁드려야 할게 또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어엇!! 매듭끈이 부족하신가요?"
"저희 총괄감독이 매듭팔찌가 정말 맘에 든다고, 다른 액세서리도 매듭으로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물어봐서요. 주인공이 어린아이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모습을 담을 건데 매듭팔찌로 시작해서 다른 매듭액세서리로 비춰지면 좋겠다고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너무 급하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이런 일이 없는데, 갑자기 얘기가 나와서요."
"매듭팔찌가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인데, 매듭액세서리라면 매듭목걸이, 이런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혹시나 대략적으로 생각하시는 이미지가 있으시면 사진으로 보내주세요. 저도 사진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선생님.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통매듭으로 만든 대략적인 매듭목걸이 이미지가 왔다.
'이런 분위기를 원하시는구나!'
감독님이 원하는 분위기를 알았으니 디자인을 다시 한다. 국화매듭 몇 개 정도로 이뤄지는 매듭목걸이라면 만드는 시간 자체는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국화매듭 하나하나를 예쁘게 다듬는데 노력이 필요하다. 중심 장식의 사이사이 간격을 균일하게 만들고 앞뒤의 매듭끈까지 일렬로 대칭을 이루게 만들려면 잔손이 많이 간다. 오전 수업 스케줄을 재빨리 바꾸고, 나는 매듭목걸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하니 항상 하는 매듭인데도 손이 낯설게 군다.
분명 촬영장이 두 군데 이상으로 나눠졌다고 하니, 매듭목걸이도 최소한 두 개를 만들어야 PD가 일하기 편할 것이다. 스태프가 촬영장에 왔다 갔다 하면서 들고 다니게 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만이라도 빨리 만들어 달라고 부탁받았지만, 이 시간이면 하나 더 만들 수 있다. 내게 매우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 생각에 목걸이 소품 들고 날아다니는 스태프는 분명 막내라인일 테니 바쁜 사람 더 바쁘게 만드는 일은 안 하고 싶다. 시간을 보니, 약속한 시간에 맞춰서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재료는 내게도 많고 손품 드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바지런히 하나 더 만들어서 준비해 둔다.
"완성했어요, PD님."
"어휴~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제 만난 PD님의 목소리에 여유가 하나도 없다. 목소리가 이미 과로로 물들었다.
"근데, 깨지는 소품도 아니고, 괜찮으시면 제가 퀵으로 보낼까요? 괜히 여기까지 오시느라 시간뺏지 마시고요."
"그렇게 해도 될까요? 그래주신다면, 제가 정말, 너무 감사하죠."
"주소만 정확히 보내주시면 제가 퀵으로 보낼게요."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받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퀵서비스 사장님께 물건을 보내고, 잘 받았다는 문자를 끝으로 격동의 1박 2일이 끝났다. 이틀간 마음도 너무 바쁘고, 갑자기 바뀐 월요일 스케줄 조정할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다. 다른 업체들이 급행서비스에 비용을 괜히 추가하는 게 아니다. 물리적으로도 바쁘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다. 다음에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기면 치킨값만큼은 더 받아야겠다 싶었다. 커피 한 잔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기름진 욕망이 몰려온다. 과하게 일했다는 뜻이다. 오늘은 1인1닭을 먹어도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겠느니!
여유를 한 스푼 뜰 때 즈음.
또다시 울리는 눈치 없는 내 휴대폰.
이틀 내내 보았던, 굳이 주소록에 저장되지 않아도 단박에 아는 PD의 전화번호, 익숙한 번호가 가파르게 움직인다.
'또 뭔가?! 나 이제 일 다 한 것 같은데!'
'매듭목걸이에 무슨 문제가 있나? 아까 잘 받았다고, 두 개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연락도 받고 끝났는데, 뭐지?'
'아, 삼세번은 너무 클리셰인데!'
그러나 까다롭게 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틀째 잠을 못 자고 촬영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디서 전화투정인가. 마흔 줄에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다. 얼른 친절하게 이야기 듣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빨리 해결하고 끝내자. 어제 들은 빠른 잉글리시로는 촬영스케줄이 조금씩 밀리고 있는 것 같던데.... 나라도 힘들게 하면 안 되겠다.
"(홈쇼핑톤으로) 네, PD님."
"자꾸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선생님. 추가되는 장면이 더 있네요."
"매듭을요?"
"네, 어린아이부터 매듭장면이 나오는데, 매듭 만드는 과정샷이 필요해요. 절반 정도 완성된 매듭상태로 만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매듭팔찌에 있던 그 디자인으로 과정샷을 촬영하시는 거죠?"
"네, 네, 그 매듭팔찌요!"
"어렵지 않아요, 금방 만들 수 있어요. 오늘 보내드리면 되죠?"
"그래주실 수 있나요? 그러면 저희는 너무 좋은데요. 너무 죄송해요, 갑자기 계속 무리한 부탁드리게 돼서요."
"뭐, 크게 무리한 부탁 아니에요. 맘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로 완성해서 보내드릴게요, 촬영장 주소만 보내주세요."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비용은 정확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잘 몰라서요."
"그 정도 일로 비용 더 받으면 제가 이 업계에서 욕을 먹을 만큼 별일이 아니에요. 일종의 시식코너 같은 일이니 맘 쓰지 마세요. 퀵비용만 영수증 처리하겠습니다."
미리 예상했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래, 시나리오상 어린이가 매듭팔찌를 만들고 어른이 돼서 매듭목걸이를 하는 맥락이라면 매듭도 단계별로 촬영되는 게 맞지. 내가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미리 제안했어도 될 일인데 일이 뒤죽박죽이 된 것 같아서 미안해진다. 다시 또 퀵 보내는 일이 없게끔 꼼꼼하게 마무리지어야겠다.
일단, 30% 정도 진행된 국화매듭 샘플을 챙기고, 또 50% 완성된 국화매듭 샘플도 준비한다. 거의 완성되는 단계의 국화매듭 샘플도 혹시 몰라서 담아둔다. 분명 스태프들은 국화매듭을 보고 그 완성도를 모를 테니 하나하나 적어서 파일링한다.
촬영하는 배우가 매듭의 어디를 잡아야 하는지 가이드가 될 수 있도록 동영상을 얼른 첨부했다. 매듭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과정샷으로,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PD님한테 보낸다. 매듭이 어떤 식으로 완성되는지, 송곳은 어떻게 쥐고 있어야 하는지, 송곳이 혹시나 촬영이 안 되는 소품이라면(송곳과 같이 날카로운 물품을 카메라 가까이 촬영하는 일을 안 하려고 한다. 방송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송곳이 흉기는 아니지만 클로우즈샷은 가급적 피한다) 송곳 없이 매듭을 하는 단계를 정확히 지정해서 보냈다. 국화매듭 날개 쪽이 대칭이 되게 잡고 있어야 오류가 없다는 주의사항도 별도로 적는다.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현장에 가서 배우한테 직접 원데이클래스라도 해줬을 텐데 이번 일은 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여유 없이 일하면 큰 실수가 있기 마련인데, 전화너머로 일하고 있는 PD님이 걱정스럽다. 별 일 없이 잘 마무리되길 바란다.
클리셰는 역시 삼세번이었던가, 숨차게 울려대던 PD전화는 다시 오지 않는다.
얼마 후, 아름다운 중동의 여인이 내가 만든 매듭목걸이를 하고 실험실에 서 있는 사진 하나가 문자로 왔다. 촬영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감사하다는 PD의 문자다. 풀영상도 보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우리 작품 나가는 모습 봤으니 충분하다. 별도로 편집본 이미지를 보내주는 PD가 많지 않은데, 뜻밖의 선물은 참 감사했다.
살다 보니 아랍왕실이 주는 돈도 받아본다. 여러모로 우연의 연속이었는데, 마지막 우연도 남겨둬야겠다. 그들이 선택한 국화매듭은 전통적 의미로 '자손과 가문의 번성'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조선 왕실에서도 국화매듭을 사용한 장식이 많다. 분명 모르고 선택한 디자인이었을 텐데 찰떡같이 골랐다. 나라의 번영을 위한 매듭으로 미래를 그리다니. 역시 아랍왕실의 재복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