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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업 : "포트폴리오 전체를 주세요." "뭬요!"

너님... 고급물건... 안 만들어봤죠?!

포트폴리오 전체를 달라고 하는 기업들이 종종 있다


 작은 공방 주인장의 일상은 꽤나 단조로운 편이다. 새벽에 개인작업을 하고, 오전과 오후에는 자수와 매듭, 한복수업, 모시조각보 등 여러 수업을 차례대로 진행한다. 저녁에는 전통 관련한 이론공부를 하거나 다음 수업 준비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 짓는다. 물론 수업시간 내내 좀 버거운 수강생이 오는 경우에는 오늘 써야 할 에너지 모두를 소진해 버려서 저녁시간에 미래지향적인 일을 할 수가 없다. 바닥난 체력과 인내심은 사지육신을 저전력모드로 바꿔놓고 내 인생을 좀먹는 유튜브를 보며 멍하게 내일을 기다리기도 한다. 하루종일 사물을 사랑하고, 사람을 상대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평상시의 일상은 조용하지만 격하다.  

 산속의 절간 같은 일상은 보통 전화 한 통으로 격동의 한복판에서 일하게 된다. 두서없는 방송국 드라마 소품팀과 대거리를 해야 할 때도 있고, 대기업 VVIP 의례용 선물로 바빠지고, 뜬금없이 아랍 왕실이 등장하기도 한다. 

 제주도 브이로그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운 바느질과 매듭짓는 공방이야기를 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은 어디로 갔는가. 전화 몇 통에 저전력모드에서 쌈닭모드로 전환된다. 무엇이 조용한 내향인을 전투적 스파르타 여인으로 만드는가!


우리 밥그릇은 내가 지킨다, 스파르타!!

 

 조선빈티지는 생각보다 여러 기업의 연락을 받는다. 자신들의 제품에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넣고 싶다고, 전통자수를 제품에 섞어서 제작을 하고 싶다고, 아직 기획단계이니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고. 그리고 내가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 행여나, 그 말을 할까 싶었으나, 기어이 하는 마지막 한 마디.

 "조선빈티지 포트폴리오 전체를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뭬요?!"

 아니, 남의 영업장 포트폴리오 전체를 다 보내주면 검토하겠다는 얘기가 너무 쉽다. 이미 공개해도 괜찮은 제품들은 공방SNS에 있고 그들이 전통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은 주제나 이미지가 필요하다면 조심스럽게 요청을 하는 거지, 당신들이 뭔데 남의 영업장 포트폴리오 전체를 살펴보고 판단을 하겠다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건지 선 넘는다.  


 우리는 꽤나 다양한 사람들의 개별적인 의뢰 목록들이 있다. 한번 작업한 것들을 다시 작업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를 위해 특별하게 의뢰한 선물인데, 같은 디자인으로 반복해서 작업한다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고 여긴다. 세상에 하나뿐인 선물을 만들고 싶어서 우리 공방에 의뢰했는데, 여러 개가 돌아다닌다면 비싸게 주문한 의의가 없는 게 아닌가. 나는 기존 손님들의 의뢰를 존중해야 한다. 그들을 위한 작품을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서 또는 상품판매를 위해서 메뉴판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기존 작업목록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게 나의 원칙이다. 

 뿐더러 자수작업은 도안디자인이 가장 중요한 차별점이다. 그래서 공방SNS에는 공개해도 괜찮은 자수 디자인들이 올라가 있고 우리 공방만의 특별한 디자인들은 가급적 공개하지 않는다. 공개되는 순간 이미 공유경제가 되어 버리는 이 세계에서 최소한의 보험이다. 

 게다가 <조선빈티지>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공방이기 때문에 우리 자산은 정확하게 지켜야 하는 의무가 내게 있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참고자료에 불과할 테지만 우리에게는 하나하나 공을 들여서 만든 자산인데 너무 쉽게 요구한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자료라면 보이지 않게 하는 게 원칙 아닌가, 언제 봤다고 나한테 조선빈티지 자료 전체를 넘겨 달라는 말을 하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에게 격하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아마 실무팀에서 연락했나 봐. 전통자수는 검색해도 잘 안 나오고 검색되는 이미지는 너네 작업물이 나오니, 별생각 없이 보고서에 쓸만한 이미지를 보내달라고 한걸 거야. 자기들도 리포트를 써서 윗사람한테 확인받고 일을 진행해야 하니까 포트폴리오에서 필요한 이미지를 쓰겠다는 거겠지. 전통자수 동네가 그렇게 예민한지 다들 모르니까.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건 아니야."

 "아니, 된장찌개 레시피도 천 만원씩 거래되는 마당에 남의 집 레시피를 다 달라고 하는 게 무슨 경우야 도대체, 나 진짜 어이가 없었다니까."

 "근데, 사람들은 그게 전통자수 레시피인지도 잘 몰라. 아마 내가 관련 프로젝트를 했어도 너한테 다 달라고 했을 것 같은데~"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분위기상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여적 화가 잔잔히 남아 있다. 

  '참나, 내가 자동차 회사 포트폴리오 다 달라고 하면 미쳤다고 할 텐데, 우리 공방 자료는 다 달라고 해도 괜찮다는 거야 뭐야....... 쳇, 나중에 쉐보레 탈 거야.' 

(...... 에휴, 다짐이 하찮아 미치겠네......)  


산중 절간 같은 공방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새벽에 나의 작업을 하고 오전과 오후에는 수강생들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의뢰받은 작업을 마무리한다. 미국의 어느 교수님 은퇴식에 맞춰서 제자들이 의뢰한 궁중자수다. 좋은 마음으로 작업해야 자수도 곱게 나온다. 포트폴리오 에피소드는 잠시 잊어버리고 얼굴도 못 봤지만, 성함도 겨우 아는 정도지만, 은퇴한 교수님의 앞날이 꽃길 같기를 잠시 기도하며 잠잠히 수놓는다. 

 흙탕물 같은 마음을 가라앉혀서 고운 연꽃 자수를 놓아야 하는데, 마음이 순하지 못하여 큰일이다. 성경에서도 분명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내주라고 했는데 어째 날이 갈수록, 네 손모가지 여기 두고 가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날아다니는 나의 너그럽지 못한 마음이 자수에 남을까 걱정이다. 내일은 한 뼘 더 너그럽길 바란다. 다음에 혹시나 또 우리 포트폴리오 전부 다 달라는 전화가 또 오면, 네 손모가지...... 아, 아니다.



사진자료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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