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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뉴스 : 바늘꽂이를 머리에 쓰면 쑥스럽다

예쁘다고 다 괜찮지 않은 관모류의 세계

배씨댕기, 양반가 어린 여자 아이의 관모류로 분류된다

 십 대 소녀부터 칠순 언니들까지 모두 모여 있는 규방공예 수업을 하다 보니, 수업시간마다 사람의 생애가 성글게 바느질 테이블 위에 놓인다. 태교를 위한 바느질부터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수의 매듭까지 관혼상제 스케줄이 빠르게 돌아간다. 예비엄마 수강생은 태어날 아기를 위해 금줄 가랜드를 만들고, 배냇저고리도 짓고, 돌쟁이 아기를 위한 첫 번째 노리개를 만든다.

 곧 시집갈 딸을 위한 혼례용품을 수놓는 어머님도 오시고, 첫 조카에게 선물해 줄 꽃신을 수놓는 예비 이모님도 있다. 이런 장면을 지켜보며, 옛날 안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각자의 바느질감을 들고 손은 바지런히 움직이고 서로의 이야깃거리는 내 간식만큼 풍성하다. 수업시간 내내 급한 푸닥거리 하듯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고선 남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자며 아쉽게 헤어진다.

 바느질 선생은 살짝 삐뚤어진 바늘땀을 찾아내고 잔소리를 추임새처럼 거든다. 그러나 나의 지적질은 다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잔소리 ASMR인가, 백색소음으로 이야깃거리에 묻혀버린다. 뭐, 공방 와서 즐거우면 됐지, 장인이 될라고 하는 바느질이 아니니 행복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싶다. 나는 취미반에서 성에 차지 않는 바느질을 만나더라도 두 눈을 질끈 감을 수 있다. 작은 공방 주인장으로서의 마땅한 바른 자세이다.

돌아기를 위한 매화꽃신, 인기 수업 커리큘럼이다.
배씨댕기 : 어린 여자 아이의 관모이다. 다 큰 처자가 하지 않는다


 조선빈티지 커리큘럼 중 <한복장신구> 수업에서는 예비신부를 위한 '꽃가마매듭'을 만들기도 하고, 돌아기를 위한 사규삼술띠나 돌띠를 만들기도 한다. 수강생 대부분이 선물용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 아이템 중에서도 항상 에피소드를 만드는 "배씨댕기"도 빠지지 않는다.

 

 여자 어린이의 대표적인 관모(冠帽: 머리를 장식하거나 보호하기 위해 머리에 쓰는 복식, 신분에 따라 착용할 수 있는 관모류가 엄격히 구분되었다)로 분류되는 <배씨댕기>는 양반가 여자 어린이들이 착용했다. 머리를 장식하는 일은 조선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를 소중히 여겼고, 관모는 곧 신분을 드러내는 일이었으므로 예를 갖추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배씨댕기는 머리숱이 적은 어린아이를 위해 장식성과 기능성을 함께 고려한 관모이다. 유물로 남겨진 배씨댕기는 보통 8~10cm 정도의 장식판과 고정하기 위한 끈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작은 꽃무늬 또는 길상문으로 수놓거나 '배씨 모양'의 칠보, 옥장식을 더해서 윗판을 화려하게 만들고 가발로 엮은 땋은 머리장식을 덧붙이거나 끈을 추가하여 아이 머리에 고정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마와 정수리 사이에 장식판을 위치시키고 덧붙이는 끈을 활용하여 아이 머리에 잘 고정되게 착용한다. 보통 붉은색 원단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통적으로 붉은색은 액운을 막고 복을 받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서 어린이 복식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이 배씨댕기는 명절에 TV를 보다가 깜짝 놀라게 만드는 관모이기도 하다. 서너 살 어린이가 해야 할 배씨댕기를 스무 살 한참 넘은 아나운서도 하고, 기상캐스터도 하고 있다. 명절마다 자꾸 배씨댕기를 하고 있으니 저것이 21세기 방송국 전통인가 싶다. 뿐만 아니라 꽤나 인기 있는 사극에서도 다 큰 처자가 커다란 배씨댕기를 하고 첫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아뉘, 그냥 귀밑머리 정도만 하지.

  왜 굳이 배씨댕기까지 해서 동네 처자들 다 모자란 애를 만들면 어째.....'  

 분명 전통복식학과 교수님들이 한 소리 했을 법도 한데 몇 해가 지나도 여전하다. 혹시 '첩지'나 '족두리'를 표현한 디자인인가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면 남은 웃음기도 사라진다.


호박핀쿠션이라 불리는 퀼트소품이다. 족두리 대신 쓰고 나오니 나는 조금 쑥스럽다.


 ‘아니, 머리에 바늘꽂이는 왜 얹어놓았나?’


 퀼트, 프랑스자수에서 많이 사용하는 호박핀쿠션(호박핀쿠션:호박모양을 닮은 바늘꽂이)을 족두리마냥 머리 장식으로 삼으니 바느질 선생은 명절에 한복 입은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가 늘 염려스럽다. 아무리 시절 따라, 세상 따라 바뀌는 게 전통이라 해도 사람들에게 스탠다드 이미지를 심어주는 뉴스 진행자들의 한복이 저렇게까지 멀리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말이다.

 행여나 배씨댕기 변형이라고 해도 한숨이 나고, 족두리의 새로운 디자인이라고 해도 아쉬운 일이다. 전통적 관습을 벗어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예쁘게 보인다고 해서 '남의 나라 바늘방석'을 머리 위에 얹고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은 이제 그만 만들었으면 좋겠다. 전통이미지를 기억할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매우 지양할 일이다.


 치마, 저고리를 입었다고 해서 한복을 갖춘 게 아니다. 최소한의 속치마와 속바지도 입지 않고 속이 훤히 드러나는 한복치마를 입고 조명 앞에 서는 무모한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직업인 아나운서가 당의를 입었다면 그에 맞는 관모를 갖추고, 계절에 맞는 노리개까지 더해져야 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었다 할 것이다. 다른 직업군이라면 그저 '전통 퓨전 패션'이라고 넘어갈 일이지만, 방송국 메인 뉴스 아나운서 직업은 조금 더 엄격해야 하지 않나.


 조선의 궁중발기에는 위계에 맞는 장식구, 특별히 계절에 맞는 노리개 규칙들을 적어 두었다. 한겨울에 옥장식을 하지 않는 법이고, 한여름에 금장식을 하지 않는다. 추석에 할 수 있는 노리개와 설날에 할 수 있는 노리개가 다르다는 의미다.

 재질뿐 아니라 갯수도 중요하다.노리개는 기본적으로 3개를 한 세트로 본다. 예외적으로 단작으로 착용했다고 하나 원칙적으로는 노리개 3개를 띠돈으로 엮어서 하나의 장신구로 본다. 노리개에 달리는 보석이나 자수 장식 모두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궁중에서는 더욱 엄격한 잣대로 착용할 수 있는 노리개 종류를 나눠 두었다. 조선시대 규칙 전체를 온전히 지킬 수 없는 노릇이더라도 방송 3사의 지위라면, 최소한의 전통은 한 번쯤 확인하고 명절을 맞았으면 좋겠다.

 

 명절날, 뉴스에서 격식을 갖춘 당의를 입고, 아기들이 착용하는 노리개를 드리운 장면을 보자니, 깐깐한 바느질 선생은 TV뉴스를 애써 못 본 척하기로 한다.

 

 '그래, 올해에는 바늘방석을 머리에 안 얹은 게 어디냐...... 속적삼이나 다름없는 민저고리를 입고 명절 인사하더니, 이제는 당의를 맞춰 입었네. 올해는 좀 낫네.'


 세세한 규칙이 살아있는 전통공예 동네에서 바느질 선생도 깜짝 놀라는 서양 바늘방석을 머리에 올리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호박핀쿠션 머리장식을 아무렇지 않게 메인뉴스 아나운서에게, 기상캐스터에게 권하지 않아야 한다. 뉴스 화면에 기록될 사람들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방송은 영원히 기록되는 매체이기에 언제나 조심스러운 법이다.


 뉴스 앵커가 한복을 입고 오늘의 뉴스를 전하는 일은 영상으로 적어 내려가는 대한민국실록이라고 생각한다. 조심스럽게 한 장면 한 장면을 찍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형식'으로서 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그 내용도 실록처럼 중요하게 기록되길 바란다.

 



사진출처 : 배씨댕기 국립중앙박물관e뮤지엄 / 국립대구박물관소장품 증4388

내용참고자료 : <전통매듭> 김은영, 대원사 / <배씨댕기>,<관모>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조선조궁중풍속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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