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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CF : 아름다운 자수는 화장품이 된다

자수 장면을 우리에게 묻는 CF감독님

영친왕비진주두루주머니향낭(국립고궁박물관소장)


웬만한 연예인들도 화장품 CF는 자랑스러운 스펙 아니던가.

그렇게 소중한 화장품 CF가 조선빈티지로 온다. 오예!!


 대기업은 역시 대기업인가…… 어느 똑똑한 분께서 화장품 용기에 전통공예 디자인을 모티브로 작업한다고 했다. 고급라인 화장품 케이스에 '영친왕비진주두루주머니향낭(약칭:진주낭)' 디자인을 더하다니, 어찌 그런 멋진 생각을!

 조선빈티지에 의뢰온 촬영내용은 <영친왕비진주두루주머니>를 수놓는 장면과 중간 과정샷을 위한 작품 그리고 완성된 작품이었다. 계약 내용도 나쁘지 않았고, 사실 이런 의뢰에 돈이 뭐가 중요한가! 화장품 CF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얼른 하나씩 준비해 보자.


 먼저, 자수 도안부터 확인한다. 클로우즈샷이 대부분일 테니 자수 도안 점검이 먼저다. 유물에 있는 원형 그대로의 도안을 사용해야 하는지 우리 스타일로 변형된 도안을 써도 되는지 사전에 확인한다.

 유물로 남아 있는 <영친왕비진주두루주머니>의 자수도안과 <조선빈티지의 진주낭> 자수 도안은 약간 다르다. 우리 강사 선생님들의 수업내용을 보호하기 위한 측면이 있고 유물보다 조금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은 부분은 디자인을 살짝 바꿔서 수업을 한다. 원형 도안의 잎사귀 방향이나 비율감을 조금씩 바꿔서 도안을 재디자인한다. 여러 선생님들과 예민하게 얽힐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함부로 도안 유출이 되지 않도록 수업 전에 여러 번 별도의 안내를 더한다. 어쩌면 별 일 아닌 듯, 옛날 도안 한 장 가지고 그렇게까지 단속을 하나 말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주 사소한 일로 보이지만 여러 개 공방이 한꺼번에 돌아가는 조선빈티지 상황에 비춰보면 내 바운더리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 너그러운 사람과 쉬운 사람은 카테고리 자체가 매우 다른 거다.


 촬영 내용상 원형 그대로의 진주낭을 써야 하는 일이다. 고운 한복 입고 수놓는 장면부터 시작할 테니 섬세하게 작업한 예쁜 우리 진주낭 디자인보다 원형 그대로의 위엄 있는 진주낭 도안으로 수놓아야겠다. 도안만 그려져 있는 상태부터 촬영이 시작되고 금사 징금수를 수놓는 장면, 징금수만 완성된 상태, 그 위에 진주를 얹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진주낭은 수십 개의 서로 다른 크기의 진주를 사용해야 완성되는 주머니이다. 금사로 수놓은 자수 이상으로 진주가 중요한 아이템이기 때문에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을 고려하며 비율감 좋은 진주로 꼼꼼하게 골라둔다. 크기 하나하나를 도안 사이즈와 비교하며 배치한다. 우리는 천연진주를 사용해서 진주낭을 제작하기 때문에 매번 재료를 들일 때마다 조금씩 다른 진주의 퀄리티와 크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 간혹 진주 사이즈에 맞춰서 도안 자체를 다시 조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작은 주머니 하나에 신경 쓸 거리가 많아서 진주낭은 언제나 고가에 거래된다...... 협찬이 안된다는 뜻이다.

 

 함께 영상에 나오는 엔틱 가위는 수입품이 분명한데 CF분위기상 고전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동시에 연출하기 위한 소품인 듯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 유물로 남아 있는 쪽가위를 가져다 놓았다면 아마 우아한 장면은 어려웠을 것이다. 분명 옛날 부잣집 마님들이 쓰던 예쁜 쪽가위들도 있었을 텐데...... 남아 있는 유물들은 거쳐온 험한 세월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이런 촬영 의뢰가 올 때마다 어찌 제대로 된 쪽가위 유물을 찾기가 어려울까 늘 의아했다. 조선시대에는 매일 쓰는 소중한 도구라서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마님 몇 분은 쪽가위도 곱게 커스텀해서 썼을 텐데, 현재 박물관에 남아 있는 쪽가위는 지나치게 투박하여 미감은 없고 기능만 남은 듯이 보인다. 촬영 장면에 그 가위를 떠올려보니 결국에는 수입품을 쓸 수밖에 없겠다.

 우리는 [고증이 끝난 아름다운 쪽가위]가 필요하다. 다음에도 비슷한 촬영이 또 있을 텐데 그때에는 어디 내놓아도 당당한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쪽가위가 함께 등장했으면 좋겠다. 쪽가위뿐 아니라 자수실도, 자수바늘도, 모두 한국에서 만든 도구로 촬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통공예를 모티브로 촬영하고 있는 이곳에서 실상은 '한국 사람'이외의 모든 재료들이 다 수입품이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혹시 시장성이 맞지 않아서 상품화되지 않더라도 영상으로 남겨지는 규중칠우 도구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기록으로 촬영되는 경우만이라도 우리의 도구들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22초 안팎의 짧은 CF지만 실로실로 언니의 가늘고 예쁜 손은 이번 촬영에서 유난히 한복 끝동과 잘 어울렸다.

 "숙련된 솜씨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바늘 끝 움직임 몇 번으로 자수하는 사람들은 야무진 우리 언니의 내공 있는 바느질 솜씨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본 CF 내용은, 실로실로 언니의 손끝과 금사징금수, 천연진주를 지나 우리의 자수가 점차 화장품 팩트커버로 바뀌어 간다. 물론 우리의 고급금사와 천연진주가 너무 플라스틱스러운 재질감으로 바뀌는 모습은 살짝 아쉬웠지만 대량으로 생산하는 상품이니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일일이 콤팩트 뚜껑마다 수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

 여러 번 다시 돌려봐도 흐뭇하다. 뿐더러 CF감독님께서 수놓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이렇게 찍는 게 맞는 건지 실로실로 언니한테 확인하면서 촬영을 진행한 일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모처럼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서 많이 감사했다. 현장에 따라서는 모니터 화면조차도 볼 수 없는 촬영장들이 있는데, 이번 감독님의 배려는 글로도 남겨두고 싶다. 자수 전문가가 촬영오류가 혹시 있었는지 확인하는 일이 어쩌면 당연한 일임에도 이 같은 사례가 감사하게 느낄 정도가 된 걸 보면 우리가 촬영현장에서 너무 험히 살았나 싶기도 하다.

 

 우리는 간혹 촬영장에서 "손대역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통 '선생님'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서 그 명칭은 여적 낯설다. 손촬영을 왔으니 손대역이 맞긴 하는데 아직도 귀에 설다. 하지만 이번 CF촬영장에서는 단순한 손대역님이 아니었고, 자수장면에 대해서는 감독님과 촬영 내용을 나눌 수 있는 전문가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간만에 웃었다. 뿌듯하고 귀한 경험이었다.    


조선빈티지의 진주낭 1 embroidered by Miseon
Embroidered by 조선빈티지


 아름다운 자수는 화장품이 된다. 다른 아름다운 물건들도 자수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궁중모란도를 수놓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반도체 도면을 금사징금수로 수놓아서 병풍을 만들어 볼까, 포니부터 시작하는 우리나라 승용차 변천사를 궁중자수로 수놓아볼까, 금성 냉장고부터 올레드 TV까지 의궤처럼 수놓으면 꽤나 재미있는 작품이 되겠다, 상상하고 웃는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전통자수는 21세기의 내용을 담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다.

 500년 전 조선시대 작품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은 무형문화재 선생님들과 이수자들이 할 일이고 21세기에 발붙이고 살고 있는 작은 공방 주인은 현재를 자수에 담고 싶다. 말나 온 김에 하나라도 작업을 해봐야겠다.

 사실, 우리나라 전통자수는 남다른 저력이 있다. 다른 나라의 자수들보다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실용성까지 놓치지 않는 영리한 공예다. 지금 이 현실세계에서는 바느질하는 모습조차 볼 기회가 없지만 우리의 자수는 조선의 전통을 끌어안고 면면히 500년을 거슬러 내려온 내공 깊은 공예라서 생명력도 남다르다.

 다만 19~20세기 전통문화의 절멸시기를 거치면서 유물을 잃고, 관련 도구도 잃고, 기술도 많이 잃었지만, 조금씩 그리고 하나씩 되찾아가고 있으니 특유의 생명력으로 결국은 본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말만 앞서면 안 되니, 반도체 도면이라도 찾아보고 자동차 역사책이라도 봐야겠다. 할 일은 항상 많은데 손은 두 개뿐이고, 급하게 연락 오는 촬영은 많고 내 손을 대신해 줄 수강생들은 갈 길이 아직 멀다. 전통자수 동네의 스타트업 공방은 슬픔과 기쁨이 직관적이다. 나도 CF처럼 우아하게 수놓고 싶지만, 어째 향단이보다 더 바쁜 종종걸음으로 일을 해야 한다. 꿈꿨던 우아한 자수는 언제나 화면 속에 있다.



사진출처 : 영친왕비진주두루주머니향낭, e뮤지엄 / 국립고궁박물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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