낄끼빠빠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끈을 만드는 과정>과 <매듭을 짓는 과정>
전통매듭은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조선시대에도 끈을 만들던 '다회장'과 매듭을 지었던 '매듭장'이 별도로 존재했다. '다회'는 다회틀에 여러 실크실을 규칙적으로 엮어서 끈을 만든다. 옆에서 봤을 때에는 단조로운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작업을 해보면 손의 텐션과 속도감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매듭끈 역시 규칙성과 광택을 잃지 않고 완성할 수 있다. 다회치는 속도감이나 손의 텐션을 놓치면 그 자리는 반드시 티가 나기 마련이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모습으로 끈을 짜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오랜 수련은 필수이고, 숙련도에 따라 어느 단계에 이르면 손끈목만 보더라도 딴생각을 하며 끈을 짠 것인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낸 것인지, 급하게 짠 것인지 주르륵 읽어낼 수 있다. 마음이 드러나는 공예이므로 함부로 작업하지 않는다.
끈 짜는 과정이 끝나면 매듭을 짓는다. 매듭짓는 과정은 자수와 성격이 비슷하다. 자신만의 리듬감이 드러나고 모양 역시 만드는 사람의 개성이 조금씩 묻어 있다. 국화매듭 하나에도 간격을 얼마나 주는지, 어느 정도 텐션을 남기는지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만드는 방법 자체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예쁘게 다듬고 완벽한 조형성을 갖추는데 수고스러움이 곁든다.
전통매듭은 하나하나마다 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받는 사람이나 상황에 맞춰서 지어져야 한다. 맥락이 있는 작업이고 손의 감각과 눈의 심미성, 균형감을 바탕으로 한다. 매우 어렵게 만들어진 손끈목을 사용하기 때문에 매듭짓는 일 역시 조심스럽다. 날카로운 송곳이 혹시나 실크사에 상처를 내지 않도록 유의한다. 실제로 송곳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작업하는 선생님들이 많다. 도구 하나에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실을 염색하고, 실을 엮어서 끈을 만들고, 소중한 끈으로 매듭짓는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완료되어야 전통매듭 하나를 지을 수 있다. 고된 과정이고 각각의 단계마다 노하우를 익히고 자기화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무엇보다 수강료도, 제작비도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통매듭은 취미로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역량을 지닌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은 비교적 적다. 여러모로 조심스러운 동네다.
이미 전통자수 동네에서 바깥일 많이 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조선빈티지>인데, 전통매듭 동네에서도 소리 나는 일은 안 했으면 싶었다. 전통매듭에 생을 걸고 열심히 작업하시는 선생님들이 하셔야 하는 일들이었고, 나는 빽다방 매니저처럼 더 많은 사람들한테 전통매듭을 쉽게 알리는 역할 정도면 알맞다. 그러나 밖에서 들어오는 일들은 그 경계가 모호하여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드라마는 조금 더 고민스럽다.
언제나 그러하듯, 불현듯 울리는 전화 한 통. 낯선 번호는 다 받아야 하는 작은 공방 사장의 자세.
"여보세요."
"여보세요, 조선빈티지인가요?"
"네, 무슨 일이시죠?"
"저는 OOO 방송국 PD인데, <다회틀> 장면이 필요해서 연락드렸어요. 매듭 관련한 협회에 연락을 했었는데 조선빈티지 쪽으로 알아보면 될 거라고 해서요."
[다회틀!]
방송국 동네에서 흔치 않은 어휘다. 보통은 매듭끈과 송곳 정도 요구하는 소품팀이 많았는데, 다회틀을 알고 있다니. 흥미롭다, 똑똑한 PD인가 보다. 왠지 전통에 대해서 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대로 나는 목소리부터 이미 가볍다. 뭐든 다 해줄 판이다. 그러나, 정신 차리자, 다회틀이다! 이건 굉장히 예민한 일이다!
https://youtu.be/B2QEjO6UoLc?si=9kpNShXVBwXpAihm
다회틀은 실크'실'을 실크'끈'으로 만들어 주는 전통매듭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다. 대부분 원뿔형의 나무에 여러 개의 실을 엮을 수 있는 조랭이떡 모양의 '토짝'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짝에 실크사들이 감겨 있고 손가락으로 토짝들을 올리고 내리는 과정을 반복해서 끈목을 만든다. 토짝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는 마치 다듬이돌에서 나는 톡탁톡탁 방망이질 소리와 비슷하다. 좋은 나무로 만든 다회틀에서 다회를 치면 잔돌이 굴러가는 맑은 시냇물 소리랑 비슷해서 오랫동안 들어도 피곤하지 않다. 다회치기 ASMR을 따로 제작해야 하나, 욕심도 생길 만큼 매력적인 소리다.
그러나 다회틀 자체가 흔한 물건이 아니라서 주변에서 보기 어렵다. 일반 사람들이 처음 다회틀을 보면 무슨 물건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송에도 별로 출연할 일이 없던 매우 낯선 유물이기 때문이다. 이번 드라마에 사람들이 다회치는 장면을 볼 수 있고 매력적인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빙그레 웃으며 이미 방송 장면 본 것만큼이나 즐거웠지만, 공방 사장 본분으로 돌아오면 (레드썬!) 현실적인 부분도 신경 써야 한다. 예민한 도구라서 방송에 나가기 전에 문제 될 소지 자체를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유물로 내려오는 다회틀을 여러 매듭 선생님들께서 개선하여 새로 제작한 경우가 있고, 선생님의 스타일에 따라 디자인과 기능이 더해져 별도의 다회틀 디자인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 시중에서는 거의 판매되지 않고 매듭 선생님께 수업을 들어야만, 선생님만의 다회틀을 받을 수 있다. 다회틀만 보고도 어느 선생님한테 수업을 들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다 똑같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매듭동네 안에서 다회틀은 이름표나 다름없다.
조선빈티지가 갖고 있는 몇 개의 다회틀이 방송에 등장하는 순간 누가 방송에 나가서 다회를 치는지 금방 특정될 수 있어서 나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십 수년 넘게 다회를 쳤다면 문제없이 방송에 나와도 되지만 우리 모두 몇 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라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특히나 오랫동안 다회쳤던 선생님들이 보신다면 대번에 완성된 실력이 아님을 눈치챌 것이다. 몇 초 안 나가는 장면이더라도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어디 방송을 나가서 다회를 치느냐고 혼날지도 모르겠다. 작은 공방 사장님이 하는 걱정의 범위는
"우리의 다회치는 모습이 과연 대표성을 지녀도 될만한 일인가!"하는 염려였다.
그리고 공예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넓은 걱정은 "다회틀 그 자체"였다.
지금의 다회틀은 조선시대 전통 다회틀을 기본으로 하지만 선생님들의 노하우와 디자인에 따라 약간씩 개선된 상태이기 때문에 드라마 배경이 조선시대라면 본래의 원형 그대로 다회틀이 등장해야 맞는 일이다. 언제고 다시 그 장면이 회자되더라도 문제 되지 않을 다회틀이 필요하다. 여러 선생님들의 커스텀이 진행된 다회틀이 아니었으면 싶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다회틀이 방송에 등장하지 않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감독님도 다회치는 정면샷이 꼭 필요하다고 하는데, 조선빈티지의 우리 언니 동생 얼굴이 공영방송에 영원히 남을 일이 되어 버린다. 내성적인 자들이 다들 너무 부담스럽다고 야단이다. 안팎이 모두 야단법석이니 나도 생각이 많아진다. 무엇보다 전통매듭 동네에서 훤히 드러나는 일은 안 하고 싶었는데, 자꾸 일이 오네......
전통 다회틀이 방송에 나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함부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직접 일을 맡지 않더라도 끝까지 잘 연결해 줘야겠다. 전통매듭 동네와 아무 인연이 없는 방송국 PD가 다회틀을 알아보는 것보다 내가 찾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다.
'조선시대 원형 다회틀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회치는 모습을 촬영해도 괜찮은 선생님은 누가 계시지?'
'내가 PD에게 걱정 없이 소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다회선생님은 누가 있나.'
'방송에 나와도 문제 될 일이 없는, 현재 이 계보에서 자유로운 선생님이 누구지?'
아! 우리 J 선생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회틀을 직접 제작하는 공방이다. 비율감으로도 가장 아름답고, 실제로 다회치는 선생님과 나무 다루는 솜씨가 무척 좋은 남편분이 함께 하는 공방이라서 그 어떠한 다회틀보다도 기능적으로 완벽하고 디자인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다. 일상 대부분을 다회치고 매듭짓는 일을 하시는 분이니 J선생님의 다회치는 장면이 방송에 나오면 어느 누구도 토달 수가 없다. 실력이든 방송에 나올 미모든 걱정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인물이다.
나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해결한 것마냥 다시 신나서 J선생님께 전화를 한다. 상황을 설명하고 방송국 PD에게 선생님 연락처를 줘도 되는지 허락받는다. 선생님께도, 선생님 공방에도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생각에 나는 자꾸 흥이 난다.
"어떻게~! TV에 나오려면, 나 열흘이라도 다이어트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머~"
쑥스러워하는 선생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방송국 PD님께 연락을 남긴다. 오늘 한 일 중 가장 뿌듯한 일이다. 방송에 오류 없는 아름다운 다회틀이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보상받는 에피소드였다. 다회틀과 함께 오후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린다. 이때 울리는 내 마음속 작은 반성의 소리……
‘박 대표님! 받는 일들을 다 넘기면 어쩐담! 조선빈티지 공방 수익에도 열정을 가져봐요~!'
...... 못 들은 척한다.......
사진자료 : 공공누리 출처표시 제 1유형 - 다회틀 <국립민속박물관> 사진자료/ 다회 <국립고궁박물관>사진자료
동영상 : 국가유산채널 다회장 유튜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