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판에 궁서체로 <조선빈티지> 수놓을 겁니다
하는 일이 전통 바느질이라 그런지, 주변 사람들도 전통과 관련한 일들을 많이 한다. 문화재 발굴하는 사람, 발굴된 문화재를 디지털 작업하는 사람, 문화재를 성분 분석하는 사람, 관련 논문 쓰는 사람들까지 한동네 사람들이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 문화재 동네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클라우드 컴퓨터처럼 공유한다. 과거 발굴작업하면서 너무 충격적이었던 장면이나 어이없던 일들, 대학원에서 문화재 복원 기술을 익힐 때 얼마나 힘들었는가 회상하기도 하고, 문화재 분석자료 샘플링을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한다. 특히 고고학자들의 주장과 다른 물질적 상황이 나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주제만 나오면 다들 불 뿜는 용처럼 이야기한다. 맺힌 게 많은가 보다. 커피 한 잔으로 부족한 시간이다.
들었던 여러 이야기 중 잊혀진 에피소드도 많았는데, 촬영장에 다녀오고 단박에 <문화재청 조끼> 이야기가 확 떠올랐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우리도 <조선빈티지 조끼>를 만들어야 하나!’
요즘은 대규모 발굴작업이 흔치 않다고 한다. 대규모 발굴은 보통 대단지 아파트 건축현장일 경우가 많은데 최근 부동산 상황 때문인지 큰 아파트 건설현장보다는 작은 규모의 발굴현장이 더 많다고 한다. 소규모 발굴이라서 작업인원 역시 소수로 배치되고 할 일은 훨씬 더 많아졌다. 상황이 이러하니, 연구실에서 책 보고 공부해야 할 고고학 박사들이 작업 현장에 직접 출동한다. 흙 파고 붓질하며 땀 흘리는 고된 일정들이다. 흙먼지 뒤집어쓰고 열심히 작업해야 약속한 기간 내에 끝낼 수 있기 때문에 꽤나 품이 든다고 했다. 높은 패널로 감춰진 현장이 아니라서 지나가는 행인들도 발굴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심상치 않다. 어떤 엄마는 손을 꼭 잡은 아이에게,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하면서 교수님, 박사님, 석사들을 싸잡아 공부 못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저 말이 자신들에게 하는 소리인지 몰랐다고 한다. 공부 못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몇 번 반복되자 박사님 한 분이 벌떡 일어나서 한마디 했다.
“아니, 어머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저희 다 박사인데!”
말에 뼈를 실어서 이야기했는데, 함부로 말하는 그 엄마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러모로 사과해야 할 발언이었다. 힘들게 일하고 밥을 먹으러 가면, 간혹 식당 입구에 발도 못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식당바닥이나 의자에 흙먼지 묻을까 봐 들어오지 말라고 손사래 치는 식당 주인이 너무 야속했다고 말하고 있는 표정이 지금 그 식당에 가 있는 것 같다. 좋은 대학에서 공부 열심히 하던 모범생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의 냉대는 큰 충격이었나 보다. 꽤나 오래전에 있었던 일 같은데 어제 겪은 것마냥 표현이 생생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교수님은 관련 기관에 <문화재청 조끼>를 요청했다고 했다. 발굴 작업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상처받지 않고 그 일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위해 별도의 표식이 필요하다고 여기신 게 아닐까 싶다. 그 후에는 발굴현장을 표시하는 플래카드도 여기저기에 걸고, 기관이 표시된 조끼도 입고 일한다고 했다. 더워도 안 벗고 싶었다고 했다.
야외 촬영장에서 내가 침선바느질, 자수바느질을 검토하러 온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소품PD와 막내PD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서른 명 가까운 스태프에게 나는 그저 촬영장이 궁금해서 쳐다보는 행인일 뿐. 그래서 그랬나 촬영장에서 구경꾼들을 통제하는 스태프는 카메라 가까이에 있는 나를 보고 자꾸만,
“어머님, 여기 계시면 안 되거든요.”
듣자마자 상당히 열받는 말을 건넨다. 예의 바르게 말하니 더 열받는다.
‘어머! 나는 노처녀지, 어머님 아니거든요!’
이미 눈은 도끼눈이었으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저희 자수 촬영이 있어서 왔어요. 바느질 장면만 확인하려고요.”
“아, 네. 그래도 여기 계시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니까 잠시 뒤편에서 기다려주세요.”
담장 뒤편으로 가니 모니터 몇 개가 설치되어 있다. 가까운 모니터 하나를 뚫어지게 본다. 바느질 장면은 촬영 자체를 길게 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다 보니 세팅을 다시 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이 될 때마다 펄럭거리는 원단도 신경 쓰이고, 그런 원단 때문에 바느질하는 손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봐 염려된다. 해질녘 촬영이라서 조명 스태프들이 바쁘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 자수 촬영 때문에 그런 건가 싶어서 모니터 화면을 더 열심히 본다. 몇 번의 세팅이 있고 나서
“컷! 오케이!”
드디어 자수 촬영이 끝났다. 나의 조바심도 끝났다. 내게 의자를 따로 갖다 준 소품 PD가 참 감사했다. PD님 개인 의자라고 하니 다음 촬영장에 올 때 우리도 저런 의자를 준비해올까 싶다. 예능에서 본 것처럼 영화감독 캠핑의자에 진한 궁서체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올까 잠시 상상해 봤다.
[조선빈티지 : 자수 및 침선촬영]
...... 상상만으로도 너무 과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또 이런 곳에 와서 어머님 소리를 두 번 듣느니, ‘조선빈티지 조끼’라도 입고 와야겠다. 고고학 교수님께서 괜히 문화재청 조끼 입고 다니시는 거 아니다. 나도 촬영장에서 스태프처럼 보이려면 햇빛가리개도 하고, 낚시꾼 모자도 쓰고, 무전기도 하나 구해올까. 실로실로 언니랑 나랑 하나씩 나눠 갖고서
“언니 원단이 너무 헐거워 보여요, 수틀 좀 당겨주세요!”
무전기로 대화하면 상당히 자수 촬영 프로들처럼 보이지 않을까. 물론 스태프들은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다. 어쨌든, 조선빈티지 조끼를 심각하게 재고해 봐야겠다. 어머님 소리는 진짜 현타 온다.
촬영장을 떠나면서 잊기 전에 메모를 남겨 둔다. 혹시나 다른 공방 선생님들이 야외 촬영에 올 때 미리 알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를 적는다.
1. 간이의자
촬영장면도 봐야 하고 대기시간도 있으니 간이의자를 챙겨가면 좋을 것 같다. 촬영장에 앉을 곳들도 있겠지만 성실한 스태프가 지나가는 행인취급을 하며 나가라고 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거리가 있는 촬영장이라면 특히 필요하다. 간이의자가 좀 과한가 싶기도 하지만 일단은 챙겨두자!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 아니면 트렁크에서 안 꺼내면 되니까.
2. 모기기피제
숲 속 한가운데 촬영장 세트가 있는 경우가 많다. 산모기가 사특하다. 날개소리가 심상치 않다. 주변을 벌처럼 돌아다닌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신경 쓰이는 장소이니 모기까지 신경 쓰는 일은 안 해야겠다. 모기기피제를 잘 챙겨서 틈틈이 뿌리고 촬영장에서 기다린다.
3. 손대역을 위한 소품 (손톱깎이 / 큐티클니퍼 /핸드크림 / 눈썹칼)
풀샷은 보통 배우가 찍기 때문에 우리는 손대역에 알맞은 준비만 하면 된다. 보통은 기본적인 네일케어를 받고서 촬영을 하지만 섬세한 카메라에 클로우즈샷까지 찍으니 혹시나 모를 준비는 해둔다. 손톱깎이, 큐티클니퍼, 핸드크림, 눈썹칼까지 작은 파우치에 담아서 들고 다닌다. 생각보다 카메라에 크게 잡히니 모니터링을 정확하게 하자. 아니다 싶으면 빨리 관계자들에게 이야기해서 바로 해결해야 한다. 뒤돌아서서 전화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4. 계절용품
자수촬영이나 침선촬영은 한 장면 정도라서 오래 기다리지 않는데 그래도 바깥 촬영장이니 더위와 추위는 기본적으로 대비를 하자. 친절하게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하고 안내해 주는 대기실도 없는 현장이니 알아서 준비하자. 기본적으로 부채, 손풍기 또는 핫팩이 필요하다. 산속 날씨일 확률이 높으니 한여름이라도 얇은 긴팔 상의 하나쯤은 준비해 가자. 낮 햇빛도 만만치 않으니 햇빛가리개나 선글라스도 필요하다. 삼십여 명 되는 스태프들 대부분이 햇빛가리개, 챙이 넓은 모자, 선글라스, 무전기, 팔토시 등 든든한 청년농부처럼 하고 다니는 게 우연이 아니다.
5. 밥차는 기대 마오
스튜디오 촬영장에서는 커피차를 만났으니, 야외촬영장에서는 밥차를 만나나 싶었는데 밥차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실망하지 말고 주변 맛집도 잘 찾아두면 시간 예상하며 밥도 잘 먹을 수 있다. 물론 촬영을 앞두니 밥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긴 하더구먼 당 떨어지면 주변인에게 자꾸 화를 내니 심리경호를 위해서라도 잘 챙겨 먹자.
6. 털북숭이 붐마이크의 예민함 - 비행기모드
이 정도 소음은 괜찮겠지 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털북숭이 붐마이크가 생각보다 굉장히 예민한가 보다. 바깥 풍경이 한옥이다 보니 온통 모래밭이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의 신발에 끌리는 모래소리도 스태프는 주변을 둘러보며 긴장했다. 간혹 드라마에서 진동으로 울리는 휴대폰에 화를 벌컥 내는 감독을 보며 예민한 성격을 드러내는 클리셰 같은 것인가 싶었는데, 촬영장에서는 진동모드도 소리가 잡힐 것 같았다. 매우 조용했다. 내 휴대폰도 얼른 비행기모드로 바꾼다. 언니 휴대폰도 얼른 비행기모드로 바꾼다. 촬영장에 도착하면 휴대폰 무음인지, 비행기모드인지 확인해 두자.
7. 소품담당자와 잘 지낼 것
조선빈티지 계약은 주로 내가 하지만 간혹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계약을 할 경우가 있었다. (여러 선생님이 조선빈티지 이름을 사용하다 보니 의뢰하는 사람은 헷갈릴 수 있다) 같이 서류쓰고 계약하는 경우가 아니라 구두로 약속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 카톡이라도, 이메일이라도 협의내용들을 꼭 적어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 이거 안되는데!’하고 바로잡으려고 해도 이미 스케줄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손댈 수가 없다. 계약 내용 조율은 촬영장 가기 전에 모두 끝나야 한다. 촬영장에서 바꿀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소품담당자와 괜히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들지 말자. 공방에서 물건 나가기 전에 문제 될 상황이나 예상되는 일들을 모두 상의하고 손 떠나는 게 맞다.
사진자료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