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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드라마 E :빨간 우산, 은빛자수, 그리고 구미호

어느 날 아침. 새로운 제작사의 새로운 스태프 전화다.

"자수 선생님이시죠? 저희 드라마에 중요한 우산이 나오는데 우산에 직접 자수를 놓아주셨으면 좋겠거든요."

"어떤 자수가 필요하시죠?"

"은사자수가 필요한데, 우산 안쪽이랑 바깥쪽이랑 똑같이 수놓아주시면 돼요."

"은사 징금수로는 앞뒤가 똑같이 나올 수가 없어요. 자수 기법상 징금수로는 앞뒤 구분이 매우 분명해요."

"아, 은사로 수놓으면 앞뒤가 달라져요?"

"네. 사진 하나 보내드릴게요."

 자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수를 설명하려고 '즐겨찾기' 앨범에는 설명을 위한 몇 장의 사진들이 미리 저장되어 있다. 스태프에게 징금수 앞면 사진과 뒷면 사진을 보냈더니 금방 이해한다. 

화려한 금사 징금수 앞면(Embroidered by Young A)
한 땀 한 땀의 노고가 담겨 있는 징금수 뒷면 (Embroidered by Young A)

 징금수는 얇은 금사나 은사를 원단에 놓고 다른 실크사로 금사와 은사를 고정하면서 도안으로 그려진 자수면을 채우거나 선을 강조하는 기법이다. 금사나 은사뿐 아니라 일반 실크사도 징금수 작업을 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잔손이 많이 가는 방식이라서 일반 공방에서는 판매용 '상품'으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작가 개인의 '작품'으로 만들어도, 큰 맘먹고 시작해야 하는 꽤나 수공이 필요한 기법이다. 특히 금사 징금수는 자수 안팎이 매우 달라서 앞뒤가 똑같은 자수가 필요할 경우 권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드라마이길래 빨간 우산에 굳이 은사 자수가 놓여야 할까.' 


 살짝 궁금했지만, 방송 전 소품컨텍상황이라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의 걱정스러운 생각으로는 그저 청순가련한 여인이 죽기 전에 수놓아준 우산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또는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가 수놓아준 우산, 이런 것만 아니면 된다 싶었다. 정말이지, 저런 클리셰는 글쓰기 전 취재에 게으른 자들의 상상이다. 시나리오 작가든 감독이든 그런 장면 쓰기 전에는 꼭 수놓는 사람하고 상담하고 글을 썼으면 좋겠다. 일생에 바느질 한 번 안 해보고 대본을 쓰고, 소품스태프들은 거기에 맞추겠다고 우리한테 연락을 한다. (뭐여......) 그 정도 취재도 안 하고 뭔 놈의 글을 쓴다는 건지. 얼굴 한 번 안 보고도 아주 오랫동안 욕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전통바느질 동네에서는 청순가련하게 바느질하지 않는다. 이곳은 웬만한 무협지보다 더 무서운 바늘칼이 날아다니는 곳이다. 선생님에 따라 바느질 계보가 있고 선생님 스타일에 영향받는 작품들이 있다. 도제식 교육이 남아있고,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들도 여럿이다. 대부분 조용하고 예리하다. 공기를 읽어내는 눈치와 선생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 손재주는 기본이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더라도 별 일 아닌 듯 털어낼 수 있는 당찬 구석도 있어야 오랫동안 규방공예를 익힐 수 있다. 사람들이 으레 바느질하는 여인으로 상상할 법한 여리여리한 코스모스 같은 여인들이 바느질 동네에도 여럿 있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하늘하늘 사라져 갔다…… 흔한 일이다.


 옛날 어머님들이 자녀들을 위해서 옷 짓고 혼례용품 만들었던 시절에야 호롱불 아래 비춰지는 여인들이 청순했겠지만, 청순한 여인들이 했던 20세기에 전통바느질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했다. 지금의 전통바느질은 불씨마저 다 꺼진 숯더미에서 겨우 불꽃 하나 두 손에 쥐고 목숨줄 붙여 놓은지 얼마 안 된, 위험한 고비만 간신히 넘긴 상태일 뿐이다. 예로부터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내려오고, 다시 딸로 이어지는 규방문화는 일제강점기, 6.25, 산업화 등 전통에 눈길 한 번 줄 여유 없이 ‘먹고사니즘’이 매섭게 휘몰아쳤던 이 땅의 역사와 맞물려 우리 스스로 저버린 전통문화가 되었다. 도자기나 궁중회화와 같은 전문가로부터 만들어진 전통공예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 사이에 면면히 내려온 생활공예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저버린 전통문화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뼈아프다.


 오늘날 어머니들은 바느질거리를 세탁소에 맡기거나 의류수거함에 던지고, 딸들은 방과 후 체험학습에서 처음 바늘을 만져본다. 바늘구멍을 몰라 바늘 한가운데에 실리본을 묶어 놓는 일도 생긴다. 바느질 선생은 이런 모습들을 보고 기가 막히다가, 안타깝다가, 내 할 일을 덜 했나 싶어 반성한다. 


 21세기에, 최첨단 하이테크놀로지 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다 죽어가는 전통 바느질 동네를 여태 지키는 이 구역 여인네들은 웬만한 관우 장비하고 맞짱 떠도 살아남을 사람만 있다는 걸 바깥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우아하고 고상한 바느질은 백화점 문화센터의 취미 자수일 뿐, 업으로 하는 바느질에서는 전투력이 이미 만렙이다. 작은 파이를 나눠 가져야 하는 시장구조 때문이기도 하고, 사업가 이전에 장인의 마음으로 일하는 공예가라서 남의 작품에 밀리고 싶지 않은 경쟁심도 한몫한다. 


 취미로 수놓는 일과 업으로써 수놓는 일은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할 일이다. 취미로 바느질하는 일이 무슨 해가 될까, 선물하면 주변에서 좋아하고 솜씨 있는 여인으로 평판 관리도 할 수 있을 테지만, 업으로 하는 자수에서는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작품을 대하고,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우리 공방 작품 중에 잘못된 바느질, 상황에 맞지 않는 자수 소품이 방송에라도 나간다면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여러 경로로 오랫동안 같은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실력 없는 공방처럼 보이는 일이 가장 치명적이다. 십 수 년 동안 잘 버텼는데 요즘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일이 많아질수록 염려가 커진다.  


  못된 클리셰 생각에 잠시 대화에 집중을 못했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니 한번 물어보는 게 낫겠다.

 “피디님, 빨간 우산에 은사 자수가 왜 필요한가요? 대사에 나오나요?”

 (‘제발 엄마 얘기는 하지 마라, 죽은 애인 얘기도 하지 마라.’)

 “네, 특별한 우산이라서요. 구미호가 무기처럼 들고 다녀요.”

 “……구미호여?”

 “아주 어렵게 구한 우산이라서 손자수를 놓아야 할 것 같은데, 전통자수는 안되나 봐요.”

 “혹시나 전통자수를 놓더라도 수틀에 고정해야 해서 우산을 뜯어야 할 수 있어요.”

 “어?! 그러면 안돼요, 완전 수제우산이라서 우산 펼쳐 놓은 채로 수를 놓으셔야 돼요.”

“그렇다면 기계자수를 쓰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섬유용 물감으로 도안을 그리기에는 입체감이 없어서 화면에 예쁘게 나오지 않을 것 같고, 비 맞는 장면이 많을 테니 안 지워지는 섬유용 물감이더라도 위험한 것 같아요. 기계자수를 사용하면 손자수만큼 깔끔한 맛은 덜하겠지만, 우산 안팎에 똑같은 자수를 놓을 수 있어요.”

 

...... 손자수 놓겠다고 온 피디님한테 기계자수를 권하는 손자수 공방 사장님이라니.....

 자수양도 많아서 실제 은사 자수를 놓았다면 가격도 적지 않았을 텐데. 

 재무담당자가 별도로 있었다면 몹시도 화를 냈을 상황이었지만, 드라마 자체를 생각한다면 내가 욕심내지 않는 게 맞는 일이었다. 주인공이 계속 들고 다니는 중요한 소품이라고 몇 번씩 강조를 하니 더욱 욕심을 버리고 드라마에 가장 적합한 상태의 소품을 추천하는 일이 맞는 일이었다. 주인공 프로필만 봐도, 세상에, 돈을 안 받고라도 해야 할 일이었고, 대략적인 시놉시스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드라마라서 몹시 탐나는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가 손대지 않고 기계자수로 돌린 일은 매우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일을 놓친 아쉬움도 기억 저편으로 넘어갈 즈음, 눈에 익은 자수 도안이 방송에 등장했다.

 청초한 애인이 수놓은 우산도 아니고, 돌아가신 엄마가 수놓은 우산도 아닌, 잘생긴 구미호님께서 당차게 들고 등장한 빨간 우산이 첫 회부터 나와서 유심히 봤다. 비는 쏟아지고 은빛 자수도 잘 보이고 우산은 곧 칼로 변해서 간 빼먹고 다니는 못된 구미호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직접 수놓지 않아도 한껏 뿌듯한 장면이었다. 못된 클리셰 대신 세상 멋진 구미호와 은빛 자수라니, 똑똑했다, 제작팀.


드라마 한 장면 대신 찾아낸 사진 자료... 무서운 저작권...



사진자료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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