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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Hwang Nov 04. 2015

우선순위

우선순위는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만드는가? 인간관계가 괴롭다면...

인간관계가 불편해지면서 나름 그 원인을 고민했던 순전히 저의 주관적 의견입니다. 감안하여 읽어주세요.




관계의 친밀도는 가치의 우선순위(priority rule)에 달려 있다. 누군가와 친해진다 또는 가까워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우선순위에서 내가 차지하는 순위가 높아져 간다는 뜻이다. 인간관계의 법칙의 출발이 우선순위다. 그리고 우리는 이 법칙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일상생활을 무난히 영위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우선순위가  안정화되어 있다. 그 순위가 별로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 않았던 사람이나 일이 그 순위에 끼어들면 우린 그것을 '변화'라고 부르며 그 변화의 수용을 수동적으로 원할 때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라고 여긴다. 이 우선순위의 변동이 심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귀가 얇은 사람(팔랑귀)' 또는 '변덕쟁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대부분 중요한 일에서 예측 가능성이 불안정한 사람이다.

또한 이 우선순위는 우리 관계 속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척도이자, 동시에 남에게 상처를 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내 우선순위 목록에서 상대방의 순위와 반대로 상대방의 우선순위에서 나의 순위가 비교적 일치하면(비슷하면) 우리는 사랑의 확인 또는 애정이 넘치는 관계로 인정한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  우선순위 비교에서 현격한 차이가 날 경우 우선순위가 낮게 랭크 되어 있는 쪽은 상대적 박탈감 내지 거절감을 느껴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우린 한정된 환경, 조건 아래 산다. 성실함으로 커버하기엔 우리의 능력이 너무 제한적임을 절감한다. 그래서 때로는 성실한 사람이 존경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성실을 높은 가치에 두는 것이다.  제한된 삶을 살기에 어쩌면 '성실'은 보충의 개념 보다 제거의 개념이 맞는 것 같다. 즉, 성실하려면 열심과 열정을 내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 뜻이다.

우리는 영리해서, 이 성실을 가장한 욕심과 세련된 거절이 우선순위에 기초한 것임을 표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삶의 한계, '시간의 제한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시간은 공평하고 누구에게 독점되지도 않는다. 비난을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속성이 이 시간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 거절의 방법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핑계대면  거절당하는 사람은 거절하는 사람의 우선순위 속에서 본인이 하위에 랭크 되어 있다는 사실 보다 그 사람의 삶의 패턴이 바쁘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이해한다. 매우 스마트한 거절 방법이지만, 뻔뻔함과 무례함이 숨어 있다.


우선순위는 시간 할애와 직결된다. 당연하다.

때로는 가족 부양 때문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보다 일에 매진해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나름대로 성실해 보이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희생하는 가장의 모습으로 비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사람의 우선순위에서 '가정(home)'은 아주 잠시라도 그 순간만큼은 그 순위를 일에 내어준 꼴이며, 미래의 안락함을 위한 희생이란 명분 아래 다른 가치 있는 것과 그 순위를 바꾼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날 만나 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말은 거짓말이다. 거절하는 그 순간 만큼은 내가 그 사람의 우선순위에서 배제된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약속을 할 때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그 우선순위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가치 평가를 받는다. 그 평가의 결과는 약속 체결이나 거절이란 열매로 나타난다. 언제나 바쁜 인상을 주는 사람은 거절하기도 편하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엔 성실한 사람으로 비친다. 이 보다 더 그럴싸한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자, 주변에 친구가 많은 사람은 밖에서 들어오는 요구나 요청도 많다. 관계가  형성되면 반드시 그 사람과 우선순위 매기는 게임을 해야 한다. 그 후보가 많을수록 그 사람은 힘들어진다. 이 부담을 완화하는 방법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만남을 갖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한정된 시간 안에서 자신의 우선순위를 처리할 수 있는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다. 따라서 사람을 곁에 많이 두는 사람은 사회생활에서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란 추측을 하지만, 깊이가 없는 만남 그리고 우선순위 조정으로 거절한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인식되어 있는 자신의 무례함과 폭력성을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내가 피하는 사람들 중 1순위는 바쁜 사람이고, 2순위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그 사람들의 우선순위에 내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나는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꾸준히 어필해야 하고, 그걸 증명해야만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내가 나와 싸우기도 힘든데 미쳤는가, 그 짓을 하고 있게? 이런 과도한 노력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칫 남을 위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1. 상대방이 내 우선순위에서 1위 + 나도 상대방 우선순위에서 1위 = 매우 행복한(만족한) 관계
2. 상대방이 내 우선순위에서 꼴찌 + 나는 상대방 우선순위에서 1위 = 상대방이 나에게 스토커일 확률이 높음
3. 상대방이 내 우선순위에서 1위 + 내가 상대방 우선순위에서 꼴찌 = 반대로 내가 상대방에게 스토커가 될 확률이 높음
4. 상대방이 내 우선순위에서 꼴찌 + 나도 상대방 우선순위에서 꼴찌 = 전화부에서만 친구(나중에 삭제만 안 당해도 다행)

[질문] 나는 당신에게 몇 번에 해당되는가?



ⓒ2015 Joseph Hwang


실천적 측면에서 게으름의 정의에는 일이나 선택을 미루는 습성이 있는데 이것은 우선순위를 못 정하거나 잘 못 정하는 것이다. 믿음의 반대 개념이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이듯, 게으름의 반대는 성실이 아니라 올바른 우선순위다. 보통 게으름을 행동의 질(質)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것이다.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가치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감정의 문제는  그다음 문제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낮은  것뿐이다. 불편한 진실이다. 다른 한편, (이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덜 아프다.)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낮은  것뿐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은 이 '우선순위'의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서로 자기의 우선순위에서 상대방을 어떻게 두고 관리 대우할 것인지 지혜를 구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우선순위도 중요하지만, 그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도 무척 중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크게 3가지로 분류한다.

1.  주고받는 사람
2.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
3. 주기만 해야 하는 사람

1번 사람이 나의 가치 우선순위에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비율이 많다면, 그 사람의 대인관계는 비교적 건강하나 덜 인간적인 사람일 경향이 높다. 2번 사람이 높은 순위에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면 상대방은 자기를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긴다고 생각해서 나한테 자신을 오픈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인간관계의 깊이가 얕을 확률이 높다. 3번 사람의 비율이 많은 사람은 남에게 헌신은 하나 상대로부터 다시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 때문에 언제나 피해의식이 커서 자기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자주 주게 될 확률이 크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사람의 종류를 위와 같이 나누고 자기의 우선순위에 그 관계를 정리한다. 불행히도 아무리 종교를 가져도 이것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인 중에 실망하는 사람도 많은 것이다. 종교 행위를 하는 것과 이 우선순위의 관계는 어쩌면 별개로 보인다. 그러나 신(神)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다면 반드시 이 우선순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정상이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다른 한편 진정한 만남이 없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세속적으로 살던 사람이 종교에 귀의하게 되면 이타적인 사람으로 많이 바뀐다.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1.  주고받는 사람 ▶ 주었으나 안 받아도  상관없는 사람
2.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 ▶ 안 받았어도 주고 싶은 사람
3. 주기만 해야 하는 사람 ▶ 계속 주고 싶은 사람


인간의 우선순위와 그 순위를 차지하는 동기는 ‘보상체계(이 '보상'이 나쁜 건 아니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神)의 사랑을 체험하고 알 게 되면서 우선순위와 관련된 보상체계에 근본적인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절대적인 신으로 인하여 손익과  관계없는 또 다른 보상체계(진정한 보상)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이것은 가치관에 영향을 주게 되고 결국 나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  순위마다 동기부여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 우선순위에 변화가 없다면 당신은 신(神)을 만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것만이 신(神)을 만난 증거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희생'을 경험을 하게 되면 강도는 각자 개인적으로 다를지 몰라도 대부분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도록 되어 있다. 그 순위도 바뀌고 순위를 차지하게 만든 이유, 즉 동기도 바뀐다. 내가 가진 우선순위, 그 가치관을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요한 걸 모르겠다면 중요하지 않는 것부터 제거해 보라. 혼란스러울 때는 보충보다 제거가 훨씬 유용한 경우가 많다. 그 제거만 잘해도 삶의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성경에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마 7:6). 돼지에게 필요한 건 보석이 아니라 단지 먹을 것이다. 돼지에게 보석을 던지면 그 보석도 못 쓰게 되고 돼지도 불행해진다. 이 말은 가치의 상실을 비유한 것이다. 가치관, 그로 인하여 정립되는 우선순위는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오늘도 우리는 상대방의 우선순위에서 비교적 높은 순위에 오르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우선순위에서 제발 나를 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든다면 어떻게 하면 서로 상처를 남기지 않고 관계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자, 험난한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2015 Joseph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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