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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코 Dec 16. 2021

30대의 연애가 힘든 이유

불완전함의 완전함과 완전함의 불완전함에 대하여

누군가가 말했다. 30대의 연애는 20대의 연애와는 다르게 정말 힘들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던 20대의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이야기들은 그저 연애에 실패하는 사람들의 넋두리일 뿐이고, 나는 30대가 되더라도 얼마든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30대가 되면 20대보다 돈도 많고 더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었을 텐데 더 쉬우면 쉬웠지 어렵다니,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오늘의 나는 콧방귀를 뀌던 그 때의 나를 생각하며 콧방귀를 뀐다.


30대의 연애가 어려운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완전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이정도 나이쯤 되면 완벽한 사람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30대쯤 되어서 찾는 사람은 크게 빠지거나 결격 사유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다. 외모, 성격, 나이, 학벌, 능력, 집안, 사상...크게 특출나지 않더라도 크게 빠지거나 크게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살아보면 이렇게 다방면에서 크게 빠지지 않거나 적절하게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크게 특출나거나 어떤 측면에서 매우 잘 맞는 사람을 찾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찌저찌 그렇게 누군가를 찾아서 연애를 시작하더라도 그것을 안정적으로 지속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분명히 마찰이 있기 마련이고 의견 충돌이 있기 마련이며, 무엇보다 나와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을 새로이 발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30대쯤 되면 이와 같은 차이점들을 확인하게 되면 그것들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빠르게 그 관계를 마무리하기 일쑤이다. 이쯤 되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픈 이별이더라도 결국 괜찮아 진다는 사실을, 꼭 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시간은 한없이 빠르게 흘러가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젊음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30대의 연애는 이성적이고 냉정하다. 그렇게 다시금 자기에게 완전한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렇게 노력하고 애쓰고 감정소모를 할 필요도 없으며, 상대방이 나를 충족시켜 줄테니깐. 30대에 들어서 부쩍 많이 사용하는 '안정적이고 편한 연애'라는 표현 뒤에는 그런 건강하지 않은 마음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20대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그렇게 '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임하기에 연애의 시작과 지속이 더 힘들다.


20대 초중반을 돌아본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는 변변찮은 시절이었지만 그 때의 나는 몇몇 측면에서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부자였는데, 연애에 있어서는 확실히 그랬다. K를 생각해 본다. 그 당시 대세였던 여자 연예인을 닮았던 그녀의 주변에는 관심을 드러내고 작업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모두 차단하고 내 곁에 있어주었다.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그 당시의 나는 돈도 없었고, 꾸밀 줄도 몰랐으며, 지금보다 더 뚱뚱했다. 그럼 내가 그녀를 풍요롭게 해주었는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변변찮은 밥을 먹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결국 그 정도가 다였다. 이에 더해 지금 생각해보면 자다가 이불을 힘차게 걷어찰 정도로 그때의 나는 못나고 찌질했다. 그런 못남과 찌질함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행동들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내 곁에 있어주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당시의 나보다 돈도 많고, 더 잘 꾸밀줄도 알며, 더 맛있는 밥을 사주고, 더 좋은 곳들에 데려다 주고, 강아지 인형 따위의 허접스러운 선물이 아닌 근사한 선물들을 사줄 수 있으며, 더 잘생기고, 더 몸도 좋고, 무엇보다 더 성숙하고 멋진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했을 것이다.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그렇게 하라고 수없이 촉구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 곁에 있어주었다. 참으로 불완전한 기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완전한 마음이다. 그 불완전한 기준으로 인해 걸러질 수 없는 상대방의 불완전함과 부족한 모습들을 포용하고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상대방 때문에 속이 썩고, 감정소모를 하고, 심지어 눈물로 밤을 지세우게 되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지켜보고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완전한 기준이고, 불완전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처럼 불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진심은 더더욱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인데, 완전한 기준은 상대방의 불완전함을 이성적으로 걸러내고 또 차단하기에 그것을 포용하고 감내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기준이 불완전하다. 순수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완전한 기준을 갖출 만큼의 자기 이해와 경험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결혼이라는 선택에서 상당히 자유롭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한 기준들 속에서 완전한 마음이 빛나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건대 어린 시절의 연애는 성숙하지는 않고, 또 현명하지는 않을 지언정, 가지고 있는 그 마음 자체는 훨씬 부유하다. 어쩌면 그것은 젊음의 또 다른 특권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K도 나도 20대 끝자락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20대 후반은 결혼을 생각하는 여성에게는 중요한 시기이고, 일반적인 남성에게는 너무나도 애매한 시기이다. 어렸을 때에는 불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래도 상관 없었겠으나, 20대 후반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20대 후반쯤 되면 불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보나 다름이 없고, 불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완전한 기준을 가지기로 결심했으며, 나는 그 완전한 기준을 충족할 수 없었다. 그렇게 K와 나의 인연은 끝이 났다.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다. 시간이 흘렀고, 그녀는 나이에 맞는 완전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떻게 되었는가? K 이후에 만났던 사람들은 그녀처럼 나의 불완전함을 포용하며 나를 만나 줄 생각이 없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나름대로 꽤 완전해진 이후에는, 나의 불완전한 기준이 발목을 잡았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또 현실적인 요소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어쩌면 부끄러울 정도로 늦게서야--배우게 되었다. 이런저런 실패들을 겪고 나서 나름의 완전한 기준을 완비하고 나니, 그 완전한 기준을 뚫고 들어올 사람이 없었다. 그 기준을 뚫고 들어올 정도의 사람쯤 되면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쯤되면 딱할 지경이다.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불완전함을 '포용'하기보단, 완전한 기준으로 불완전함을 걸러내고 남은 완전함을 '수용'하고자 하는 것. 참으로 딱하고 가난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늙어버린 것일까, 상처와 감정소모를 두려워 하는 겁쟁이가 된 것일까, 아니면 사랑 앞에서도 속물이 되어버린 것일까? 나도 그렇고 상대방도 그렇게 연애를 접근하다 보니 연애의 지속은 커녕 시작 자체도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관찰하고 평가하면서, 또 더 잘 평가받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가꾸고 발전시키면서. 마치 면접마냥, 마치 오디션마냥 말이다. 어렸을 적보다 돈도 더 많아졌고, 더 잘 꾸밀 줄 알게 되었고, 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더 좋은 곳들에 갈 수 있게 되었고, 강아지 인형 따위의 허접스러운 것이 아닌 근사한 것들을 사고 또 선물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은 훨씬 더 가난해지고 곤궁해진 셈이다. 그런 것들을 이성적이고 현명한 판단이라고 애써 포장하고 정당화해 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가난해지고 또 그만큼 쓸쓸해졌다는 것을. 완전한 기준 뒤에 불완전한 마음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것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K의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세월이 지났다. 당연히 나는 그녀를 잊고 살아가지만, 흔해 빠졌던 그녀의 이름과 같은 이름의 동명이인들을 살면서 만나거나 그 이름을 어딘가에서 접하게 되면, 나도 몰래 문득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참 고마운 불완전함이었구나. 참 고마운 완전함이었구나. 부디 완전하게 행복하기를. 그렇게 나에게 허락된 짧은 생각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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