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 탐방기
우수(雨水)를 사흘 앞둔 설 하루 전날, 따뜻한 햇볕 아래 오랜만에 니콘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섰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헌인릉길 34)에 위치한 조선왕릉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을 향해 30여 분 차를 몰았다. 날씨는 영상 3도에 맑은 하늘, 사진 찍기에 딱 좋은 날이었지만 얼굴에 와 닿는 바람에는 겨울의 차가움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절기상 봄이었지만 봄은 노리꼬리만큼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묻힌 헌릉. 규모도 석물도 보통 왕릉의 2배 크기다>
오늘 찾은 헌릉은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다. 태종은 필자의 18대조 할아버지이시다. 그 분의 둘째 아드님이신 효령대군이 필자의 17대조 할아버지로,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중시조이시다.
인릉은 정조 아들인 조선 23대 임금 순조와 그 비 순원왕후의 능이다. 헌인릉 관리사무소를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곧바로 순조와 순원왕후가 합장된 인릉이 올려다 보인다. 오른쪽 길을 따라 300여 미터 올라가면 태종과 원경왕후의 봉분이 각각 배치된 헌릉이 나타난다.
순조 임금의 인릉은 사연이 많은 곳이다. 이 자리는 본래 태종의 아들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자리했던 곳이다. 효성이 지극했던 세종은 사후 아버지 태종 곁에 머물고 싶어 했고, 1450년(세종 32년) 음력 2월 17일 승하한 후 아버지 헌릉 옆에 능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묘자리는 '후사가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다-(絶嗣損長子 : 절사손장자)'라는 지관들의 의견에 따라, 승하한 지 19년 만인 1469년(예종 1년)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다.
세종의 영릉이 여주로 떠난 지 377년 만에 그 빈자리에 순조의 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순조도 처음부터 이곳에 묻힌 것은 아니다. 승하 이듬해인 1835년, 처음에는 파주 교하에 능이 조성됐다. 그러나 1856년(철종 7년) 파주 능지의 습기와 석물 균열 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철종의 명에 따라 이해에 이장되었다. 이어 1857년(철종 8년) 순조비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합장함으로써 오늘날의 인릉이 완성되었다. 이때 다시 거론된 자리가 바로 옛 세종의 능 자리였다. 당시 지관들은 예종 시절의 부정적인 평가를 뒤집고, "이곳은 본래 대명당이며, 과거의 불운은 능의 방향(좌향)이 잘못된 탓이지 땅 자체의 기운은 훌륭하다"고 재해석하여 철종에게 건의했다.
순조의 인릉이 이곳으로 옮겨진 가장 큰 명분 중 하나는 "태종 대왕(헌릉)의 곁으로 모신다"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에서 조상의 능 근처에 후대의 능을 조성하는 것은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조상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의미가 컸다. 철종으로서는 비어 있는 옛 명당이자 강력했던 태종이 계신 곳으로 순조를 모시는 것이 최선의 효도라 판단한 것이었다.
<순조와 순원왕후가 합장된 인릉. 조촐하고 단아하다>
인릉 조성에는 세종의 능을 여주로 옮길 당시 땅에 묻고 간 석물들이 대거 재활용되었다. 현재 인릉의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 등은 대부분 인근에 묻혀 있던 세종의 옛 영릉과 장경왕후의 옛 희릉 석물을 다시 꺼내 다듬어 사용한 것이라 한다. 이전 당시 운반이 어려워 땅에 묻었던 석물들은 1970년대 발굴 조사를 통해 일부가 세상에 다시 나왔고, 현재는 서울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 야외 전시장에 보존되어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비극적인 점은, 지관들이 경고했던 '절사손장자'의 예언이 순조의 가계에서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는 사실이다.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 역시 후사 없이 23세에 승하했다. 이후 순원왕후는 7촌 조카뻘인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을 순조의 양아들로 입적시켜 보위에 오르게 했으니, 그가 바로 철종이다. 철종 또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며 순조의 직계 혈통이 끊기고 말았다. 풍수학자들은 이를 두고 "땅의 흉한 기운이 여전했다"고 말하고, 역사학자들은 "세도 정치로 인한 왕실의 쇠락"으로 분석한다. 누구의 분석이 맞을까?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헌릉과 인릉을 비교해 보면 두 임금의 위상이 확연히 드러난다. 헌릉 주인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왕자의 난으로 반대 세력을 제거한 뒤 보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기간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왕권을 크게 공고히 했다. 그는 조선 27대 임금 중 가장 강력한 왕으로 꼽힌다. 그래서 그의 능도 다른 조선왕릉에 비해 석물이 두 배나 많고 능의 규모도 압도적이다. 반면 인릉은 기울어가는 왕조의 운명을 반영하듯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하다. 강력한 군주 태종의 헌릉이 화이불치(華而不侈: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라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희생물인 순조 인릉은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나 초라하지 않다)라 하겠다. 참고로 조선왕릉은 총 42기로, 이 중 2기(정종의 후릉과 태조비 신의왕후의 제릉)는 북한에, 나머지 40기는 남한에 있다. 남한의 왕릉들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강한 자의 능은 땅을 압도하고, 기울어진 왕조의 능은 땅에 스며들 듯, 역사는 돌에도 그 무게를 새겨 놓는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헌인릉을 나서는 길,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오백 년 세월은 조용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26.2.16 玄潭 이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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