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별세 3일 전 마지막 붓질

서울 강남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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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별세 3일 전 마지막 붓질

나는 종종 강남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를 찾는다. 코엑스 빌딩 숲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는 그 절에 들어서면, 세상의 소음이 문득 멀어진다. 경내를 거닐다 보면 발길은 자연스레 한 곳으로 향한다. 판전(板殿).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처마 아래 걸린 현판 두 글자 — 板殿.


처음 보는 사람은 의아해할 수 있다. 글씨가 어딘지 어눌하다. 획이 굵고 투박하며, 어린아이가 큰 붓으로 힘껏 눌러 쓴 것 같기도 하다. 세간에서는 이 서체를 '동자체(童子體)'라 부른다.

나는 이 현판 앞에 설 때마다 엄숙해진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선생.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서예가였던 그가 이 두 글자를 쓴 날은 1856년 10월 7일(음력)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인 10월 10일, 그는 서울 근교 과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판 옆에는 작은 글씨로 낙관이 새겨져 있다.


七十一果病中作 칠십일과병중작 ("71세의 과천 사람이 병석에서 쓰다.")

그것이 전부다. 그것이 추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서양에는 'Swan Song, 백조의 노래'라는 말이 있다. 백조는 평생 소리를 내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노래를 부른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이다.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 인간의 마지막 목소리를 가리킨다.추사의 '판전'은 그의 Swan Song이었다.


제주도 유배 9년, 북청 유배 2년.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그가, 병석에서 마지막 기력을 끌어모아 남긴 것은 거창한 철학도, 후대를 위한 유언도 아니었다. 그저 승려(영기(永奇) 스님)의 부탁을 받아 쓴 작은 전각의 이름 두 글자였다.


그런데 그 두 글자가, 1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 걸려 있다.

추사가 붓을 들었던 것처럼, 너는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아무 꾸밈 없이, 욕심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가는 것. '잘되고 못됨을 따지지 않는 경지' — 불계공졸(不計工拙).

현판 아래 서서 나는 오늘도 그 물음을 품고 절을 나선다. 빌딩 숲 속으로...


봉은사 판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26.3.7 현담 이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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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족:

1) 추사의 별세와 판전의 시기

추사 김정희는 1856년 10월 10일(음력), 양력으로는 1856년 11월 7일에 충남 예산 과천에서 별세하셨습니다. 향년 71세였습니다.

'판전' 글씨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즉 운명하기 직전, 거의 마지막 숨결로 남긴 절필(絶筆)에 해당합니다.


2) 판전의 내력

봉은사는 추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입니다. 추사는 말년에 과천에 머물며 봉은사를 자주 드나들었고, 당시 봉은사의 승려 영기(永奇) 스님과 각별한 교분을 나눴습니다.

봉은사에는 경전을 새긴 목판을 보관하는 전각이 있었는데, 영기 스님이 추사에게 그 전각의 현판 글씨를 부탁했습니다. 추사는 별세 3일 전, 병석에서 마지막 기력을 모아 '板殿(판전)' 두 글자를 써주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글씨는 현재 봉은사 법보전(옛 판전) 현판으로 걸려 있으며, 추사 글씨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3) 왜 '판전'인가?

'판전(板殿)'은 경판을 보관하는 전각, 즉 경판고(經板庫) 를 뜻합니다. 봉은사는 조선시대부터 중요한 경전의 목판(木板)을 소장한 사찰이었습니다. 특히 『화엄경』 목판 등 다수의 경판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보관하는 전각을 '판전'이라 불렀고, 그 건물의 현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추사체의 마지막 경지

흥미로운 점은 이 '판전' 글씨가 추사체의 완숙한 경지를 넘어, 어린아이가 쓴 듯한 천진(天眞)하고 졸박(拙朴)한 필치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추사 스스로도 평생 글씨를 갈고닦아 마지막에는 기교를 다 버린 경지, 즉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의 극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 소박하고 힘 빠진 듯한 글씨야말로 추사 일생의 예술적 완성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26.3.9 현담 이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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