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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Dec 22. 2021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구원에서 회귀로, 소년에서 어른으로




스포가 있습니다.





감상의 결론부터 말하면 마블 팬들에게 <어벤저스: 엔드 게임>이 최고의 선물이자 헌사였던 것처럼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스파이더맨 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자 헌사입니다. 다만 <엔드 게임>이 성심성의껏 준비한 선물이었다면 <노 웨이 홈>은 겉려한 피상적인 선물 같까요. 서사 구조는 좋았지만 디테일이 너무 부족했던 영화. 최고의 치트키를 쓴 것에 비해 초라한 결과물. 내적으로는 여러모로 허술하고 아쉽지만 그럼에도 주인공 톰을 응원하게 되는 멋진 결말을 이끌어낸 영화. 이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서사

서사의 기본 구조는 꽤 괜찮습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관통하는 서사는 스파이더맨의 가장 가까운 주변인의 피해(혹은 희생)와 부딪히는 주인공의 존재론적 갈등입니다. 1대 스파이더맨인 토비 맥과이어, 2대인 앤드류 가필드, 그리고 3대이자 현재 톰 홀랜드까지 저마다 디테일의 결은 다르지만 영웅의 힘을 얻고, 지인이 피해를 입고, 갈등하고, 고뇌하고, 극복하는 이 일련의 스토리 변화가 스파이더맨 서사의 공통된 플롯입니다(이점은 다른 히어로물에도 어느 정도 적용 가능하긴 하지만). 현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의 특징이라면 이전 토비나 앤드류 보다 더 평범한 미국 고등학생스러운 가벼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톤 앤 매너가 이전 스파이디들보다 더 하이틴 영화스럽죠. 토비와 앤드류가 홀로 어둠과 슬픔을 돌파하면서 외로움과 싸워야 했던 반면 톰에겐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 지지해주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어벤저스라는 든든한 조직, 유사 부자 관계였던 토니 스타크, 믿음직한 베스트 프렌드, 그리고 톰이 가장 기대는 존재인 여자 친구 MJ. 갈등과 부침을 겪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여기저기 기댈 구석이 많았던 톰은 세 명의 스파이디들 중 가장 밝고 평범한 여느 또래 십 대 고등학생스럽고 또 어리기도 합니다.



<노 웨이 홈> 이야기의 시작은 그런 공통된 스파이더맨 서사의 연장입니다. 선배(!) 스파이디들이 지녔던 부수적 피해가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는 비극이었기 때문에 가슴에 멍에를 끌어안고 죄책감을 지닌 채 살아간 반면, 톰에겐 그런 무거움이 없습니다(아이언맨의 죽음이 오롯이 톰 때문이 아닌 만큼 궤가 다르니 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노 웨이 홈>이 택한 부수적 피해라는 것은 톰 때문에 친구들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것. 다른 스파이더맨과 달리 가볍다고 할 수 있죠. '또 한 번의 기회'라는 이 영화의 주제는 정체가 밝혀진 톰이 친구들과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져야 한다며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원치 않게 나쁜 선택을 했던 악당들, 자책감에 시달렸던 선배 스파이더맨들까지 일관되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구원과 회귀로 완결됩니다. 여자 친구와 가장 친한 친구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악당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로 되돌아갑니다. 토비와 앤드류는 자신들을 괴롭혀왔던 죄책감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는 법. 톰은 고모의 죽음을 겪으면서 결국 깊은 멍에를 안게 됐고, 모든 이의 기억에서 증발함으로써 홀로 외로움과의 사투를 시작하게 됩니다. 가볍고 명랑했던 톰은 타인을 구원하는 무거운 선택을 함으로써 결국 운명처럼 선배(!)들의 뒤를 따라 스파이더맨의 숙명에 빨려 들어갑니다. 어벤저스의 일원으로서, 토니 스타크의 아들과 같은 존재로서, 기술적으로 정서적으로 든든한 지원을 받아왔던 톰 홀랜드에게 이제 남은 것은 허름한 원룸과 몇 개의 박스에 든 가재도구, 아무 첨단 기술도 장착되지 않은 스파이더맨 슈트뿐.





단점

이렇듯 <노 웨이 홈> 서사는 그 시작과 끝을 이루는 뼈대가 꽤 탄탄하지만 그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이 영화는 이야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끊임없이 노출시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개연성. 톰이 닥터 스트레인지에 때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일련의 과정은 꾸역꾸역 고구마를 입 안에 넣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고, 마법 상자(!)를 빼앗는 신을 보면 천하의 악당이 바로 여기 있구나 싶습니다. 시공간을 가지고 노는 우주적 스케일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이기는 자가 고작 미물(!)에 불과한 고블린에게 처참하게 당하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자면 인지부조화 크리티컬이 터지지 않는 한 납득 불가능합니다. 톰이 가자고 해서 해피의 집까지 쫄래쫄래 따라가는 악당들을 보면 세상에 이런 촌극이 없고 도마뱀은 왜 트럭에 따로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어차피 촌극에 도마뱀 한 마리 더 딸려간들 이상할 것 없는데 말이죠. 해피의 집에서 악당들을 인간으로 돌릴 시약을 뚝딱뚝딱 만드는 과정은 인공지능의 힘과 기술을 빌린다고 하니 어찌어찌 넘어가지만 그것을 고등학교 과학실에서 금세 만들어내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천하의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어 보이던 악당들이 시약을 맞고 일 초 만에 "띠로링~" 반성 모드에 들어가는 황당하고 도식적인 모습은 "너 웃기려고 이러는 거지? 그치?"



각 스파이더맨의 특징을 전혀 살리지 못한 후반 액션씬도 아쉽습니다. 힘들게 지난 스파이디들을 불러온 만큼 토비 스파이더맨의 뭔가 억울하고 울보스럽고 안쓰러운 액션, 앤드류 스파이더맨의 가볍고 날랜 아웃복서식 액션, 톰의 '첨단 테크놀로지 슈트(!)' 등 서로 다른 격투 스타일을 잘 살려 합동작전을 했다면 풍성한 한가위 같은 액션 시퀀스가 펼쳐졌을 텐데 천하의 치트키를 갖다 쓰고도 이런 맹물 같은 액션이 이어진 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과연 이런 최고의 판을 깔았음에도 이야기를 이렇게 밖에 끌고 갈 수 없었나 하는 것입니다. 토비와 앤드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스파이더맨을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봐왔던 관객이라면 누구나 받을 가슴 찡한 강력한 한 방을 줍니다. 하지만 그 강력한 "뽕"은 영화가 줄곧 추억팔이와 썰렁한 농담 사이를 오고 가면서 약빨을 잃어갑니다.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습니까 닝겐.





장점

하지만 치트키는 치트키. 셋이 함께 있는 장면만으로 때때로 과거의 세월과 현재가 공존하면서 자아내는 진한 감정의 삼각파도를 만들어냅니다. 이런 비슷한 감정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7>에서 한 솔로와 츄바카, 레아, C3PO, R2D2를 볼 때의 그 느낌.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나름 다들 열심히 했겠지만 이왕 고생할 거 조금만 더 고민했다면 이것보다 더 큰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었을 거 같은데 토비, 앤드류, 톰이 한 자리에 모여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게 고작 이름 불렸을 때 서로 대답하거나 등 스트레칭해주는 따위의 피상적이고 썰렁한 농담 따먹기 밖에 없었을까. 감독과 작가들이 야속할 따름입니다.



심각한 개연성 문제와 썰렁한 농담들 때문에 정서가 제대로 쌓이지 않는 상황에서 슬픈 장면이 꽤 오래 이어지는 컷을 보면서 아니 할리우드 놈들이 이제 배울 게 없어 K-신파를 답습하나 싶었습니다. 할리우드는 전통적으로 이렇게까지 '오열'을 오래 전시하면서 "관객 여러분 여기서 이제 우셔야 합니다" 노골적으로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죠(많은 관객이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겠지만..). 오히려 신파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제 코 끝을 찡하게 만든 건 영화 후반 MJ의 반창고였습니다. MJ와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도넛 가게를 찾은 톰, 본격적으로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 보이는 MJ 이마의 반창고. 그리고 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감정들. 울컥했습니다. 차마 준비한 말을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가게를 떠나는 톰, 영문을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MJ. 감정을 절제한 그 담담하고 짧은 씬이 몇 분간 오열하는 씬보다 훨씬 강한 울림을 줬습니다. 그리고 반창고를 통해 영화에서 '상징'이라는 기호가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그 정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톰과 MJ의 연기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 것이고요.



톰 스파이더맨은 선배 스파이더맨들과 달리 줄 곧 상승 곡선이었습니다. 화려하고 철없고 가벼웠습니다. 그랬던 톰이 결국은 선배들처럼 가슴의 멍에를 안게 됐습니다. 그리고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의 구원을 택한 후 골방에서 외로움과 사투하는 '오리지널' 스파이더맨의 모습으로 회귀했습니다. 톰 홀랜드 삼부작 스파이더맨을 끝내는데 이보다 더 멋진 결말이 있을 수 있을까. 끝이 좋으면 용서된다 했던가요, 이 영화가 기나긴 러닝타임 내내 저지른 모든 헛발질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톰의 일상을 보여주는 마지막 시퀀스, 그 처연하고 쓸쓸하지만 묘한 긍정의 공기가 있는 그 시퀀스, MJ의 반창고에서 감정의 파장을 크게 일으키고는 담담하게 원룸 씬까지 이어지는 그 부드러운 질감의 감정선은 최근 본 그 어느 시퀀스보다 멋진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월요일 오후임에도 웬만한 극장의 스파이더맨 상영은 거의 매진,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 옆 좌석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 앉았는데, 토비와 앤드류가 나올 때 박수를 치면서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스파이더맨의 큰 팬도 아니고 히어로물 흥미는 잃은 지 오래전이라 뜨끈 미지근했지만 그럼에도 극장을 찾은 건 좋은 평도 평이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습니다. 영화적 체험에 대한 갈증. 몰입감을 높여주는 암전 된 실내, 큰 스크린과 빵빵한 음향, 코를 간질이는 꼬소한 팝콘 향, 서로 말은 없지만 함께 웃고 울며 알게 모르게 정서를 공유하는 동료(!) 관객과의 유대감 등 오직 극장 만이 줄 수 있는 그 체험을 오랜만에 다시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영화 관람도 하나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하고 컴컴한 실내에서 향긋한 팝콘과 시원한 콜라를 먹으며 슬프면 울고 웃기면 웃고 좋으면 박수 치고 휘파람을 부는 이 모든 경험이 단순히 평면 위에 펼쳐지는 영상을 보기만 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닌 오감으로 경험하고 즐기는 종합적인 체험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도서관처럼 가만히 숨죽여 앉아 있는 것보다 감정 표현을 자유롭게 하는 게 더 좋은 영화 관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콘서트 같은 분위기인 미국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을 더 선호합니다(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있겠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 한국에서 한두 번 극장에 갔지만 팝콘이나 음료수 반입도 없이 다들 멀찍이 떨어져 앉아 관람하는 영화는 온전한 영화 관람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갈증을 느껴 마신 물이 소금물인 상황.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정말 오랜만에 제가 원하는 영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줬습니다. 잊고 있던 그 경험을 다시 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에게 감사합니다.



ps.

home은 house와 구별됩니다. house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지칭하는 반면, home은 정서를 아우릅니다. 볕이 따뜻한 날 느긋하게 늘어지고 있는 사이 탁탁탁 부엌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도마 위 칼소리와 치익하는 밥솥 소리. 그 편안함과 따뜻함, home을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home은 물리적 건물이나 집 뿐 아니라 동네나 지역사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개념을 확장시키면 home은 공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특정 시간이 될 수도, 사람이 될 수도,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No way home. 톰은 이제 돌아갈 home이 없습니다.


편안한 둥지와 어미새의 품을 떠나야 새는 비로소 한 마리의 원숙한 어른 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곳 하나 기댈 곳 없이 홀로 서는 톰을 우리는 더 이상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야속하게도 성숙은 아픔이 구석 한 켠에 자리 잡은, 조금은 무거워진 가슴과 함께 찾아옵니다. 그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극복한 사람이 성숙하고 멋진 어른으로 거듭나는 것이겠죠. 한때 톰 홀랜드에게 있었던 포근하고 따뜻한 home은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톰은 앞으로 새로운 home을 스스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익숙한 공간을 만들고 친구를 만들고 배우자를 만들겠죠. 스스로 home을 만드는 그 과정이 때로 힘들고 외롭겠지만 그 여정 속에서 조금씩 단단한 어른이 되어갈 것입니다. 이 영화가 끝나고 많은 관객과 팬들은 그런 톰의 홀로서기를 응원할 것입니다. 그 홀로서기를 통해 톰이 아빠처럼 따르고 존경했던 토니 스타크 같은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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