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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Apr 16. 2022

<야차>

그냥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는 게 어떠신지요



고리타분한 전개와 설정.

설익은 연출.

(감독님 연출한 작품이 몇 개인데 아직도 이런 연출을...)

어설픈 편집.

(뚝뚝 황당하게 끊어지고 시작되는 씬들과 이어 붙는 충격과 공포의 격투 컷들. 그나마 K-무비에서 볼만하다 내세울만한 게 거칠지만 박력 있는 격투 시퀀스였는데 그것마저..)

넋 빠진 유머.

여기저기 구멍 뚫린 개연성.

1980년대 감성 진득하게 느껴지는 마지막 액션 시퀀스(일부러 의도하신 거 맞죠?).




K-Movie, 그 A급과 B급 간의 기괴한 단차


<기생충>처럼 날카롭고 세련된, 재미 여부를 떠나 적어도 영화의 기술적 차원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영화가 나오는 시대(심지어 몇 년이 지난 시점에)에 이런 어설픈 영화가 나온다는 게 말이 되냐 할 수 있지만 그건 어차피 봉준호 감독 이야기, 충분히 말이 됩니다. 이런 극단적으로 상반된 연출력과 결과물은 미국에서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라면 미국은 세련되게 잘 다듬어진 A급 상업영화, feature film으로 갈 것인지, 거칠고 병맛 나는 B movie로 갈 건지 기획 단계부터 분리되고 예산이 투입되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이 나오는 반면 한국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죠. 전국 단위로 개봉하는 상업영화가 재미없고 히트를 못 치는 경우는 미국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다만 재미 여부를 떠나서 영화의 만듦새, 즉 기술적 완성도만큼은 높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놀랍게도 처음 기획단계부터 A급 텐트 폴 영화를 지향하면서 많은 예산과 그에 걸맞게 유명 배우들이 출연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설픈 결과물을 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A급 기획과 예산의 투입, B급의 산출. 어느 부분은 너무 힘이 들어가 있고 어느 부분은 너무 엉성한 그 괴리가 만들어내는 기괴한 단차. 저는 그 순수한 결정체가 <리얼>이 아닐까 하는데, 사실 <리얼>은 기술적인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영화의 시나리오와 연출 방향 자체가 처음부터 뒤틀린 흔치 않은 케이스이고 그래서 저에게는 그 어떤 영화보다 흥미로운 영화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런 거칠고 기괴한 영화들은 해가 갈수록 더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예산과 결과물 간의 큰 간극이 연출해내는 의도치 않은 어설픔과 괴이함이 이제 "K-movie"라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많이 아쉽지만 요즘 같이 힘들 때 이런 영화라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투자자들과 배우, 스태프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차와 시카리오


<야차>는 <시카리오>와 비슷한 서사로 전개됩니다. <시카리오>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악에 악으로 맞서는 정부 집단, 우연한 기회에 그 상황에 빠지게 된 정의롭고 순수한 한 영혼, 그 인물의 눈을 통해 바라본 어둠의 세계. <시카리오>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연출력을 보여주지만, 외적으로도 탁월한 이유는 마약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다루는 방식 때문입니다. 시장을 지배하는 하나의 강력한 마약 카르텔이 사라지면 중소 조직들의 서로 다투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고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는 반면 하나의 조직이 장악하면 사회는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예측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미국 정부는 하나의 카르텔만 잘 모니터링하고 관리하면 되죠. 과연 어떤 것이 더 좋은 방법일까. 일망타진을 하면서 쑥대밭을 만드는 것? 물론 모든 조직을 일망타진시키고 전 세계에서 마약을 없애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건 이상일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차선책을 택해야 합니다. 드니 블뤼브 감독은 <시카리오>에서 이런 묵직한 메시지를 중언부언하지 않습니다. 숨 막히는 러닝타임이 모두 지나고 한숨을 돌리고 나면 그때서야 감독의 메시지가 밀물처럼 머리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특정 멕시코 국경 지역이 얼마나 마약에 피폐해져 있는지, 정부 조직까지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단 몇 개의 컷으로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듣고 보니 <야차>도 비슷합니다. 혼란스러운 어둠의 각축장, 대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부의 요원들, 그리고 그 진흙탕에 우연히 빠지게 된 정의롭지만 순수한 영혼. 여기까지 배경과 소재만 다를 뿐 설정은 똑같죠. 하지만 그 설정을 펼치는 과정과 디테일, 던지는 메시지와 그것을 던지는 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야차>를 보면서 쉽게 국정원 요원들에 이입이 되던가요. 그들이 벌이는 그 모든 폭력들이 정말 필요한 것들인지 납득이 가던가요. 극에 아무런 영향도 안 미치는 북한 정보부는 왜 영화에 끌어들인 걸까요. 주인공이 북한 정보요원과 연인이라는 설정은 왜 넣은 걸까요. <시카리오>는 한때 순수했던 주인공이 암흑을 목도하고 거대한 정부와 현실의 벽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하면서 끝이 납니다. 그 모든 지독한 범죄와 살인, 현실의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혼란스러워하면서 저항하던 주인공. 차가운 총구 앞에서 끝내 포기하는 발버둥. 별 말 없는 몇 컷의 몽타주로 구성된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 내내 이어진 높은 긴장과 어두운 톤 앤 매너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정말 훌륭한 장면이었습니다. <야차>는 어땠나요. 영화 마지막 국정원 요원의 전화를 받은 검사의 반응, 통쾌하게 웃으며 흔쾌히 미션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은 그가 중국에서 겪었던 그 모든 살인과 폭력, 혼란과 갈등이 무색해보입니다.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정의로운 검사로서 그동안 그를 지탱했던 정의와 과정에 대한 믿음과 정반대 되는 상황과 생각을 어떠한 깊은 갈등이나 고뇌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이 "K-무비"의 기괴한 뒤틀림이 갖는 공통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재미와 메시지의 충돌. 액션 쾌감을 위해 인권이나 생명의 소중함 따윈 개나 줘버린 할리우드 식 액션물의 설정과 액션을 그대로 베끼면서 한술 더 떠 그것보다 더 폭력적이고 가학적입니다. 그 어두운 상황과 엄청난 폭력을 너무도 일상적이고 가볍게 우리 앞에 던집니다. 그러면서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닐만한 부조리를 대하는 어떤 고뇌나 갈등 등 혼란스러운 내면의 입체적인 묘사를 거부합니다. 당연합니다. 대부분 한국 감독들이 그리는 사회는 선과 악이 명확한 이분법적 사회입니다. 그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 또한 명확합니다. 이데아가 너무도 명확한 그들이기에 인간 군상은 종이인형처럼 단순합니다. 그러면서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복잡한 내면 묘사 대신 틀에 박힌 모습의 검찰, 경찰, 조폭, 재벌, 언론을 위치시키고 본격적인 사회 비판과 정의의 훈계를 시작합니다. 


사회를 이루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묘사가 거세된 상황에서 사회를 논합니다. 어떤 모습이 올바른 모습이고 정의인지 훈계합니다. 한국 영화들이 서로 경쟁하듯 전시하는 압도적인 가학성과 폭력성,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그 거대한 폭력을 어떠한 반성이나 고민, 주저함이나 변호 없이 무자비하게 관객에게 쏟아내는 그 무자비한 과정이 정작 감독이 관객에게 훈계하기 위해 마련한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 밀려드는 그 어떤 허망함. 영화 내내 내가 겪어야만 했던 그 오싹하고 고통스러웠던 그 모든 시간이 결국 또 이런 훈계를 듣기 위함이었구나 느끼는 그 허탈감. 더 나아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재미와 흥미라는 가면을 씌우고 하는 훈계가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 전달이라는 불순한 의도였음을 깨달았을 때, 나의 돈과 시간이 결국 또 "그런 것들"에 낭비되고 있었음을 자각했을 때 느끼는 분노.



재미를 가장한 선전


예산과 결과물 간에 간극을 보이는 것, 재미없고 어설픈 것, 모두 능력 밖의 문제이거나 나름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려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남한과 북한은 친구이고 서로 통일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이 통일되면 강대국이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방해한다. 그리고 그 주역은 언제나 일본 혹은 미국, 아니면 둘 모두"


처음에는 이 설정이 단순히 재미나 현실적인 정세를 반영한 것이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설정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화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정치적 선전물이 되는 순간. 액션이 재미가 아닌 도구가 되는 순간. <야차>가 바로 그런 "재미를 가장한 선전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 영화는 한 술 더 떠 '국정원'의 원장이 일본과 내통한다는 설정에 한국 사회 각계각층에 일본 프락치가 있다는 설정으로까지 적극적으로 '친일 프레임'을 확장시킵니다. 이런 거 보면 유난히 프락치에 집착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야 다들 아실 테고요. 여하튼 "직접 항일투쟁은 못 했지만 반일운동은 앞장선다", "유니클로는 절대 가지 않는다", "죽창을 들자", "내가 안중근이다" 뭐 이런 대사가 직접 등장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영화 마지막, 웅장한 음악이 깔리면서 나오는 대사라는 것이 고작 "정의는 반드시 지켜진다". 


그렇다면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감독 본인이 정의 구현을 위해 영화 내내 미화했던 국정원 요원들, 용병이나 범죄조직도 아니고 한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한국도 아닌 다른 나라에서 체계도 통제도 없이 마구잡이로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행위들이 감독이 정의하는 "정의 구현"인 것인지.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는 목적을 위해 어떤 법치나 정당한 과정을 생략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끝으로


그렇게 훈계하고 싶고 정치운동을 하고 싶으시면 남의 돈으로 이런 교묘한 장난질 치지 마시고 광화문에서 "대학생 진보연합" 학생들과 시위를 하는 게 어떠신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발 영화를 교훈의 수단, 훈계의 수단,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영화라는 매체를 오염시키는 건 이제 그만 멈춰졌으면 합니다.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울고 웃으면서 재미있게 영화 보고 싶습니다. 이제 한국 영화라고 하면 여러 의미에서 색안경부터 끼고 보게 되는 저 자신이 너무 서글픕니다. 그리고 배우, 스태프들도 영화 한 편 찍는 게 대단히 거창한 사회운동하는 80년대 운동권 투사가 된양 착각하고 행동하지 마세요. 보기 안 좋습니다. 그렇게 정 목에 힘주고 싶으시면 <시카리오>처럼 정말 기깔난 결과물이라도 내놓시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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