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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an 30. 2022

지금 우리 학교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할 드라마



고질적인 한국식 작법의 연장. 평면적인 캐릭터. 느슨한 관계들. 앞뒤 좌우 어느 하나 긴밀히 연결되지 못한 채 파편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의미한 사건들. 그 속에서 소모적으로 버려지는 인물들. 잔인한 폭력과 무거운 진지함 속에 불균질하게 끼여있는 어이없는 코미디. 어디 은퇴한 지 한참 된 명예교수님이 메가폰을 잡고 있는 듯한 옛스럽고 촌스러운 연출. 계속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죽음과 슬픔들. 서사는 엔딩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고집스러울 만큼 고정되어 있는 캐릭터들.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우리 학교는>을 재미없고 피상적인 좀비 학원물로 전락시킵니다. 이 드라마는 재미없음을 넘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합니다. 그 이유는 반복되는 "그만해". 크건 작건 사건이 발생하면 아이들은 같은 패턴으로 말다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툼은 여기저기서 나오는 "그만해"와 함께 멈추죠. 이런 반복된 패턴은 극 초반이나 후반 상관없이 그 고저나 긴장도가 똑같습니다. 극을 추동시키지도 캐릭터 변화나 관계 구축에도 전혀 도움을 주지도 않죠. 매 에피소드마다 반복되는 그 다툼이 실상 극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발성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배우들이 여기저기서 높은 피치로 싸우고 짜증 내는 신을 매 화마다 반복적으로 시청하는 큰 곤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이런 신들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 한국 영화/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한국식 작법. 이런 한국식 작법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캐릭터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자의식을 갖고 상황에 대처하면서 변화해가는 유기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인물은 이 캐릭터, 저 인물은 저 캐릭터, 한번 지정되면 끝까지 고정됩니다. 그렇게 캐릭터가 고정된 인물들은 극의 초반부터 끝까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상황에 반응합니다. 그리고 이런 수동적인 종이인형들(!)은 작가가 정해주는 대로 얘는 1번, 얘는 2번, 도구로써 쓰이고는 사라집니다. 



이런 피상적이고 평면적인 서사 진행을 우린 "도식적"이라고 말합니다. 잘 직조된 세계관에서 능동적인 존재들이 상황에 대처하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런 극 전개는 긴장감이 넘치고 펄떡거리는 힘이 있습니다. 반면 기계적이고 도식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은 흐물흐물 비실비실거립니다. 관객이 "아 진짜 재미없네" 느끼는 데에는 무수히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도식적인 전개에 기인합니다(물론 다른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흐물흐물 힘없는 전개와 서사. 대부분 한국 콘텐츠에서 나타나는 흔한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작품이 매우 낮은 수준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K-콘텐츠'라는 국뽕에 거하게 취한 미디어와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설정에 대한 아쉬움을 잠깐 이야기해보죠. 학교가 배경인 만큼 <배틀 로열>처럼 본격적으로 무겁고 잔인한 생존물로 갈 것이 아니었다면 욕설과 폭력의 수위를 줄이고 경쾌한 방식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보는 내내 들었습니다. 인물 간 관계 속에서 사랑과 질투가 꽤 비중 있게 그려지는 만큼 무겁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가 서사에 곁들여졌다면 친구들의 죽음에서 터지는 비극과 슬픔의 감정선이 더 극대화되지 않았을까 합니다(설정이 그렇게 받쳐줘도 감독의 이런 연출력으로는....).




설정의 아쉬움이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떠나서 이 드라마의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이 작품은 겉으로는 폭력적인 시스템과 인간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대단히 모순적입니다. 생명이 소중하다. 죽으면 안 된다. 죽지 마라, 극 중 인물들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말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의 연출은 캐릭터들을 너무도 가볍게 거칠게 대합니다. 주인공의 어머니,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는 아이, 괴롭힘을 당하고 반나체 사진을 찍힌 여자 아이와 그 친구 등 세심하게 묘사되어야 할 캐릭터가 너무 가볍게 취급되고 소모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회적 이슈나 주제의식은 때로 한 명의 인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과연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는 설정이 필요했을까요. 생각해보면 그 학생이 등장하는 시퀀스 전체가 극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러닝타임만 잡아먹는 불필요한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특정 주제의식을 전달하고자 했다면 해당 시퀀스는 훨씬 더 조심스럽고 깊이 있게 다뤄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의 행동을 통해 그 주제의식이 드러났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퀀스 전체는 죽은 시퀀스,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시간이 돼버립니다. 이 드라마는 어땠나요. 한 여학생이 배가 아픕니다, 양수가 터지고,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습니다. 그러곤 이내 좀비로 변합니다. 그게 끝입니다. 그 짧은 과정 어디에도 관련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일말의 연출이 없습니다. 먼발치에서 건조하게 "여기 이런 애도 있어" 하며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해나가듯 묘사되는 연출 속에서 이 드라마는(이 감독은) 학생에 대한 어떠한 따뜻한 애정이나 존중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려 깊지 못한 이 연출 방식이 너무 건조하고 피상적이어서 감독은 마치 이런 학생을 냉소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괴롭힘 당하고 촬영당한 여고생도 마찬가지. 학교 내 폭력과 괴롭힘, 스마트폰 촬영은 점점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피해자를 드라마에서 묘사하려면 세심한 접근이 요구될 것입니다. 전국에 그런 괴롭힘을 당하고 있거나 당했었던 많은 아이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야기 어디에서도 극 중 피해학생을 존중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껏 한다는 게 복수심을 보여주는 것. 이 드라마는 마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어디에도 따뜻한 손길 따위 없으니 너희도 복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서 더 납득하기 힘든 부분은 그 여고생을 괴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함께 괴롭힘 당한 남자아이를 물어 좀비로 만들고 수용 캠프를 난장판으로 만들고는 실험 대상으로 전락해버립니다. 이 드라마가 해당 캐릭터를 왜 등장시켰는지, 이 캐릭터를 통해 전해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감독은 이런 식으로 그 어떤 것 하나 깊이 다루지 않습니다. 학교가 배경이니까 도구나 소품처럼 넣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느낌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학교 문제들이 단순히 드라마 흥미를 위한 도구로 쓰기에 너무 예민한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감독은 비슷한 상황에 있을 수많은 피해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무엇을 느낄지, 본인의 연출이 그들의 상처를 들쑤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혀 자각이 없어 보입니다.




모든 영화가 캐릭터를 통해 문제의식이나 메시지를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에일리언 2>에서는 차례차례 주요 인물들이 죽어가지만 누구도 메시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 죽음들이 거창한 사회적 메시지나 의미를 갖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어색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에일리언 2>이 오락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애초에 어떤 심각한 문제제기를 할 생각이 없었고(베트남 전쟁을 은유한다고는 하지만)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오락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관객은 그걸 알기에 누군가의 죽음이나 폭력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부담 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감독과 관객 간 무언의 계약이 존재했고 감독은 훌륭히 그 계약을 완수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어땠습니까. 이 드라마는 단순한 오락물인가요. 이 작품은 괴물(좀비)이 나온다는 점만 제외하면 <에일리언 2>와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드라마입니다. <에일리언 2> 속 이야기는 그 누구도 나의 이야기, 내 친구의 이야기, 내 주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 모든 죽음과 폭력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학교는>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가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는 학생', '학교폭력을 당하는 학생'을 등장시킨 순간 이 드라마는 가벼운 오락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 모티프를 등장시킨 순간, '루비콘 강'을 건넌 것입니다. 전국, 혹은 전 세계에서 비슷한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을 무수히 많은 학생들과 그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이나 "학교폭력"이 나오는 이 드라마를 시청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이 드라마는 12부라는 긴 에피소드 내내 '세월호 사건'을 언급합니다. 세월호 사건은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의 모든 부모, 모든 학생, 모든 가족, 모든 한국인이 깊은 충격과 상처를 받은 거대한 국가적 재난이자 비극입니다. 이러한 심각한 사회 문제를 건드리고 싶었다면 이런 문제로 상처 입었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성폭행이나 총기 사건 등 특정 사건을 영화의 소재로 쓰려면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오락물이 됐건 사회비판극이 됐건 그 의도를 떠나서 비슷한 사건을 겪은 피해자에게는 그 영화가 제2의 가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실패한 드라마입니다. 좀비라는 장르물이 주는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가볍게 오락적으로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각종 학교 문제와 세월호 사건 관련 메시지를 던질 것인지 방향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러운 제 예상은 이렇습니다. 'K-좀비'가 잘 나가니까 좀비물을 만들어보자. 어떤 좀비물이 좋을까. 좀 쌈박한 거 없을까. 학교 좀비 어떤가. 신선하지 않나. 기획 단계부터 세월호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흥미와 신선함 때문에 '학교에서 벌어지는 좀비물'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배경을 학교로 확정 지은 후에 그에 딸려 오는 관련 이슈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느 좀비물들처럼 잔인하게 좀비들 좀 죽이고 중간중간에 학교 폭력, 여고생 출산 같은 것들 좀 넣어보자. 그러다 세월호까지 그 접점을 연결했을 것입니다. 애초에 큰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12회라는 길고 긴 시간 속에서도 각종 이슈를 겉만 긁을 뿐 심도 깊게 다루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지금 우리 학교는>의 구조적인 충돌이 있습니다. 시청자는 재미있는 좀비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각종 무거운 사회적 이슈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그래서 이런 이슈들을 다루는 사회비판극인 줄 알았는데 정작 그걸 깊게 다루진 않고, 그런데 그런 와중에 폭력은 너무 잔인하고, 그런데 어이없고 썰렁한 농담들을 하고, 그러면서 내 딸 내 아들 같은 고등학생들이 괴물로 변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어느 하나 제대로 통일감을 이루는 구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따로 있습니다. 애초에 좀비물이라는 장르가 각종 학교 문제와 세월호 사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온당한 장르물인가 하는 점입니다. 좀비물이 주는 장르가 주는 재미의 핵심은 폭력입니다. '어떤 무기를 이용해서 어떤 기발한 방식으로 흥미롭고 잔인하게 좀비들을 도륙하는가.' 이 짜릿한 폭력의 카타르시스가 좀비라는 장르의 핵심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관객이 폭력을 부담 없이 즐기기 위해선 그 서사가 누구의 이야기도 돼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인 좀비 영화에서 도륙되는 좀비를 관객이 통쾌하게 즐기는 이유는 좀비라는 괴물이 우리 중 그 누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좀비는 명백하게 '세월호 희생자'를,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생존자'를 상징합니다. 이 드라마는 한국의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이자 모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 세월호 희생자를 상징하는 좀비가 피칠갑을 하고 괴물같이 이리저리 몸을 꺾고 뛰어다니는 모습이 편하게 받아들여질 리 없습니다. 주인공들이 좀비를 때려죽이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물에 잠기는 세월호에서 빠져나가려고 서로를 죽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드라마는 세월호 희생자로 상징되는 좀비들을 패대기치고, 꼬챙이로 찌르고, 화살로 꽂습니다. 이런 폭력을 어떻게 즐길 수 있습니까.



적어도 감독과 작가, 기획자는 좀비물이 주는 폭력의 쾌감이 이 드라마가 다루는 각종 학교 이슈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걸 인지했어야 합니다. 좀비가 피해자를 상징하기 때문에 드라마 속 모든 폭력이 곧 생존자와 희생자 상호 간의 폭력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세월호라는 모티프를 이 서사에서 완전히 탈색시키거나 아니면 학생들이 좀비로 변해서 서로 죽이는 설정 자체를 처음부터 재고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의 좀비는 다른 여느 좀비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징그러운 괴물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것으로 묘사되고 그런 좀비를 죽이는 높은 수위의 폭력 또한 아무렇지 않게 전시됩니다. 감독은 끊임없이 세월호 이미지를 드라마에 중첩시키면서 학생들 서로가 서로를 감염시키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잔인하게 그립니다. 감독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감독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연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전혀 자각이 없습니다. 오락물을 만들고 있는지 사회 비판극을 만들고 있는지, 아픔을 가진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지, 후벼 파는지, 살아남은 아이들과 좀비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학교라는 공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학생 간 폭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어떤 것에도 아무런 자각과 의식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세월호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아이들이 서로 죽고 죽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이렇게 잔인하게 전시할 수는 없습니다. 세심히 다뤄져야 할 각종 학교 문제들의 피해자들을 이렇게 쉽게 소모시키고 괴물처럼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만약 아기를 낳은 당사자 학생이었다면? 그 아이의 엄마나 아빠였다면? 내가 학교 폭력을 당한 당사자였다면? 당사자의 부모님이었다면? 내가 세월호 희생자의 아버지였다면? 이 드라마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감독이 이들 중 어느 한 명이었어도 이런 드라마를 찍었을까요? 세상 시름 잊고 싶어서 퇴근 후 넷플릭스를 켰고 "새로 K-좀비물이 나왔다더라", "스케일 대박이라더라" 해서 틀었는데 이런 끔찍한 학원 좀비물에서 내가, 내 아이가 겪은 이야기가 나온다면? 만약 내 아이가 실제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을 택했었다면? 괴물 같은 좀비로 변하고 입과 머리에 꼬챙이가 찔리고 화살이 박히는 아이들 중 한 명이 내 아이라는 생각이 들면 아마 저는 오열하다가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 감독은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감독은 이런 식의 묘사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 또한 정의이고 희생자와 생존자 가족을 향한 추모와 위로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감독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의, 공감이란 아름다운 외피를 싸고 피해자를 들쑤시는 폭력적인 피해자 포르노가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너무도 만연하기 때문에 감독은 이런 방식의 서사와 묘사가 뭐가 문제인지 최소한의 자각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드라마는 별점이나 평점, 완성도를 떠나서 애초에 기획 단계에서 걸러졌어야 하는, 만들어져선 안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사건과 같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거대한 비극을 다루기 위해선 '재미' 혹은 '내가 중심이 된 감성과 동정'이 아니라 피해자 입장에서 극도의 신중함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아무런 고민 없이 유행에 편승해서 재미를 추구하는 일은 멈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작업보다 훨씬 깊은 고민과 높은 수준의 시나리오 작법 능력, 섬세한 연출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의로운 메시지를 담지하더라도 결국 영화와 드라마는 관객에게 재미를 주어야 합니다. 거대한 사회적 비극을 다루면서 공감과 위안, 재미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작업입니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그토록 많은 찬사를 받은 이유는 작품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동일본 대지진과 피해자를 언급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위로와 위안을 받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를 향한 세심한 배려와 공감,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알레고리를 통한 은유적인 화법에 녹여 냄으로써 피해자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작업. 그런 작업은 고도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몇 명이나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을 해낼 수 있을지 헤아리기 힘듭니다. 아니, 우리나라 영화 중에서 <너의 이름은>처럼 간접적인 화법으로 사회적 비극을 다루면서 희생자를 위로하는 작품이 존재하기는 했었나요. 적어도 저의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하나 같이 모두 직접적이고 동정적이고 비판적이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이고 날이 서있습니다. 좀비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은 그런 저급한 K-화법의 연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런 싸구려 사회비판, 싸구려 동정극은 그만 만들어져야 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s.

이 드라마에서 수 없이 지나가는 말과 상징, 행동은 우리가 지난 수년간 지겹게 보고 들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어른을 믿지 마라", "너희는 너희가 스스로 챙겨라", "아무도 너희를 도와주지 않는다", "아무도 믿지 마라". 왜 저런 말들을 쏟아졌는지 이해는 합니다. 문제는, 이런 일차원적이고 근시안적인 슬로건들이 안 그래도 불신이 가득한 한국 사회에 불신을 더욱 팽배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유튜브가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입바른 강사의 일회성 강연회가 아이들을 키워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듣기 싫지만 옆에서 타이르고 힘이 필요할 때 힘이 되어 주고 따뜻한 사랑을 주는 어른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의 사랑과 존중, 훈육, 배려, 안내가 필요합니다. 어른 없는 사회, 어른을 불신하는 사회, 서로 간의 불신을 조장하는 사회, 신뢰가 사라진 사회, 그런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내재화한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그 사회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타인을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는 사회. "어른을 믿지 마라"는 싸구려 감성 슬로건은 그런 사회를 조장하는 말이었습니다.



대신 어른들은 "우리가 잘못했다" 진정으로 참회하면서도 "그럼에도 우리를 믿어달라. 우리 서로를 더 믿자. 이 일을 바탕으로 더 좋은 사회, 더 믿을 수 있는 사회, 더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고 말했어야 합니다. 한국은 사회 불신을 조장하며 퇴보하는 대신 비극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 더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줬어야 합니다. 거의 남아있지 않던 작은 사회적 신뢰와 믿음마저 땅에 매장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워 들어 묻은 흙을 털어내고 서로의 가슴에 달았어야 합니다. 타인 간의 신뢰, 지역사회에서의 신뢰, 세대 간의 신뢰가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어야 합니다. 깊은 고민 없이 당장의 미안함과 충격, 눈앞의 정치적 이해 때문에 아이들에게 마구잡이로 던진 말들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과 결과로 되돌아올지 누구도 진지하게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회 신뢰는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적어도 세월호 사건을 말하고 싶었다면 <지금 우리 학교는>는 이런 식으로 폭력을 그리지 말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어른들을 믿지 마라", "당신들을 믿지 않겠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반복적으로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저는 이 드라마가 우리 사회의 불신을 더욱 조장하는 것 같아서 이 모든 무책임한 연출에 너무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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