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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Dec 26. 2021

돈 룩 업

이해할 수 없는 자폭



한국에서 가장 기대작이 <고요의 바다>였다면 미국에서 가장 큰 기대를 받았던 영화는 <돈 룩 업>이었습니다. 코미디적인 요소가 강한 재난영화로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면서 비평가들로부터 평이 대단했습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었죠. 


알려진 대로 영화는 인류가 망할 수 있는 크기의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절체절명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촌극을 가벼운 터치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몇 번 크게 웃은 적도 있고요. 어떻게 전개되려나 흥미롭게 보고 있었는데, 점점 영화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대강 내용은 이렇습니다, 천문학 교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의 제자 제니퍼 로렌스는 지구를 멸망시킬 소행성을 발견하고 백악관에 찾아갑니다. 명백히 모든 데이터는 지구 멸망으로 수렴하고 있지만 미국의 대통령은 느긋합니다. 6개월 후 인류가 망할 예정인데 좀 더 지켜보자고 하죠. 세상에 이 위기를 알릴 요량으로 그 둘은 방송에 나가지만 정작 방송과 사람들의 관심은 둘의 코너 직전에 출연한 유명 연예인의 깜짝 결혼 발표에 있습니다. 방송에서 아무리 지구를 향해 소행성이 오고 있다고 해도 진행자들은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넘길 뿐. 그 상황에서 역정 내는 제니퍼 로렌스는 인터넷에서 '미친년' 취급을 받습니다. 놀랍게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중간선거에서 질 위험에 빠진 대통령은 소행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한껏 공포심을 유발하며 애국심을 자극합니다. 소행성의 궤도를 바꾸기 위해 수십 발의 핵미사일을 발사하지만 곧 취소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갑부인 IT회사의 회장으로 대통령에게 가장 큰 후원을 하며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그의 한 마디에 발사가 취소된 것. 그는 소행성에서 값비싼 광물을 캐낼 수 있는 기회를 봤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후부터 정부는 소행성이 별 일이 아니라고 선전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위험한 소행성은 있지도 않다고 하죠. 과학을 믿고 진실을 말하려는 이들은 "Look Up", 하늘을 보라고 주장하지만 대통령과 지지자들은 "Don't Look Up", 쳐다보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소행성으로부터 광물을 채취한 후 산산조각 낼 거라고 자신만만하던 회장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인류는 멸망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는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가장 좋았던 점은 소행성이라는 알레고리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라"와 "쳐다보지 마라"는 영화 속 양 진영의 구호는 현재 미국의 분열된 정치 사회 상황을 잘 드러냅니다. 영화의 제작 시점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돈 룩 업>에서 소행성은 투표 조작, 지구온난화, 코로나 바이러스 등 다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명석한 은유입니다. 양측에서 주장하는 "하늘"은 "현실" 혹은 "과학적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겠죠어쨌든 저는 이 '소행성'과 '하늘'이 최근 어떤 정치 풍자극에서도 볼 수 없었던 탁월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합니다. 어둡거나 심각하지 않게 가벼운 터치로 풍자하는 방식 역시 훌륭한 선택이고요. <돈 룩 업>이 영화 끝까지 이 가벼움을 유지했다면 정말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중반을 지나면서 균형을 잃고 무너져갑니다. 본격 트럼프 비방 영화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죠. 여기저기에서 트럼프를 연상시키고 그것을 조롱하는 요소들로 차고 넘칩니다. 비서실장으로 있는 대통령 아들은 행색을 보아 코카인에 쩔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는 중요한 이슈는 지나치고 헛소리만 지껄이기 일쑤죠. IT회사의 회장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을 제 방 마냥 드나들고 대통령은 꼭두각시처럼 그에게 쩔쩔맵니다. 그런 풍자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점점 극으로 치닫던 이 영화는 결국 선을 넘어버립니다. 


두 번째 출연한 방송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말도 안 되게 돌아가는 현실에 참지 못하고 결국 "명백한 현실을 보지 않고 과학을 믿지 않고 정치 선동만 일삼는 미국의 대통령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다 이것들아 정신들 차려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죠. 순간 이게 뭐지? 이렇게 노골적이라고? 그걸 이렇게 소리 질러댄다고? 이런 건 한국 영화에서나 있던 것 아니었나? <돈 룩 업>이 지금까지 재기발랄하게 쌓아온 모든 풍자와 위트가 산산조각 나버린 순간. 저는 뒤통수를 맞은 듯 한동안 멍해졌습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에서 수많은 정치 영화들이 제작됐지만(모두 그다지 썩 좋지 않았죠) 이토록 노골적인 표현은 없었습니다. 이 영화는 풍자영화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악수를 두었습니다. 마치 니체가 주인에게 매 맞는 말에게 달려가 말을 끌어 안고 울부짖은 후 미쳐버린 것처럼, 이 영화 작업을 하던 작가나 감독이 한순간 정신이 나가버린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디카프리오가 소리를 지르는 씬은 정신 나간 장면이었습니다. 그 씬 이후의 내용은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더군요. 대체 이 난데없는 씬은 뭐였을까 싶은 생각뿐.




일전에도 잠깐 언급하긴 했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미덕은 비판과 감정을 노골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결국 희망과 긍정으로 귀결되는 할리우드 영화가 마뜩잖은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런 긍정이 미국과 할리우드의 힘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현실이 힘들다고 '힘들다' 푸념하고 자조하는 이는 3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긍정을 보는 이는 1류다. 결국 시궁창같은 현실을 바꾸는 건 냉소하면서 주저 앉아 있는 이들이 아닌 긍정하면서 희망을 갖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니까요. 긍정과 희망, 저는 그것이 할리우드 더 나아가 미국이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프다고 하염없이 눈물과 절규를 클로즈업하면서 감정을 더 부추기는 건 마치 성행위에 그저 카메라를 들이밀기만 하는 포르노와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한바탕 울고 증발하는 싸구려 감정보다 슬픔과 우울을 절제할 줄 아는 것,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이어지는 먹먹한 감정은 그 절제에서 나오지 전시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하게 한국 영화스러운 점들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 영화가 인기를 얻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자극적이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 현실, 감정 묘사가 아닐까 합니다. 전 세계의 영화 팬들과 시네필들은 그런 한국 영화 특유의 우울함과 날 것에서 오는 '매운맛' 묘사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찬양했습니다. 저만의 망상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세계적 현상이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나 생각합니다. 평소같았으면 진작에 끝났을 씬이 상당 시간 지속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을 카메라가 피사체에게 더 들어가는 씬들은 기존 할리우드에선 보지 못했던 낯익은 기시감. 한국적 영상. 이런 기시감이 심심찮게 여러 영화에서 느껴집니다. 




<돈 룩 업>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씬도 그런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할리우드 정치풍자 영화에서도 이렇게 노골적이고 과잉된 비난은 본 적이 없습니다. Show Don't Tell.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영화 원칙을 어겨도 한참 어긴 이 하나의 씬으로 <돈 룩 업>은 자폭해버렸다,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ps. 

코미디 상황에서 한두박자 이른 타이밍에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특유의 빠른 스타일이 낯익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빅 쇼트>의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돈 룩 업>의 감독은 <빅 쇼트>의 그 감독, 아담 맥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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