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난 혼자 버는 여자 친구가 됐다 01
우리는 홍콩의 한 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여행 중 우연히 찾아온 로맨스도, 누군가 주선해 준 소개팅도 아니었다. 그날 그는 내게 생맥주 따르는 법을 가르쳐줬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직접 따른 황금빛 생맥주와 하얀 거품의 대비를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가 그때 그런 나를 이상한 데서 희열을 느끼는 변태라고 생각했다는 걸.
당시 홍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나는 하루 12시간 근무도 모자라 주말에도 회사 업무에 매달렸다.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해야 성공하는 줄 알았다. 어린 시절 내가 봤던 아빠의 모습은 항상 그랬기에.
그렇지만 사회 초년생의 패기에도 번아웃은 왔다. 집행하는 광고의 효율이 떨어질까 두려워 몇 주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니 불현듯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침 침사추이에 새로 오픈한 한국식 치킨집에서 홀 알바를 시작했다.
제2의 백종원을 꿈꾸며 호기롭게 첫 출근을 하던 날, 대표님보다도 먼저 가게에 나와 오픈 준비를 하던 그는 내게 머쓱히 웃으며 이름을 말했고 나는 그에게 꾸벅 인사가 아닌 악수를 청했다. 첫 만남은 어딘가 어색했지만, 우리는 그 후 몇 달간 함께 일하며 꽤나 호흡이 잘 맞는 복식조로 발전했다.
내가 만만히 봤던 요식업은 막상 경험해 보니 사무직보다 근무 시간이 더 길고 체력적으로도 더 힘들었다. 다른 직업과 달리 요식업이 적성인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저 자신을 갈아 넣어 버텨야만 성공할 수 있는 분야였다. 번아웃을 끝내고자 시작한 일 때문에 또 한 차례의 번아웃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일 년도 되지 않아 식당 일을 그만뒀고, 일을 그만두고도 유일하게 연락을 이어갔던 그와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연애 기간이 2년에 접어들 무렵, 나는 태국에서 새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전국 각지를 돌며 직영 매장을 관리했다. 내가 태국에서 마주한 여유로움은 생활비 때문에 허덕이던 홍콩 생활 끝에 찾아온 선물과도 같았던 반면, 그는 잦은 이사와 초과 근무로 인해 여러 모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 하는 장거리 연애였지만 사실 그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상반된 일상이 잠정 무기한으로 계속되어야만 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오늘 병원에 갔는데 이렇게 일하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 나도 이제 늙었나 봐."라는 그의 장난 섞인 말을 들을 때면 가슴 한 켠이 시렸다. 그의 인생에도 휴식이 있다면 좋을 텐데. 윗선의 눈치를 보며 겨우 얻어낸 3박 4일 휴가 말고, 진짜 휴식.
나는 특이하고 극단적인 상상을 꽤나 많이 하는 편이지만, 그때까지 외벌이는 내 경우의 수에 없었다. 스타트업을 전전하던 내 연봉은 누가 봐도 낮은 편이었고 워낙 이직이 잦았던 터라 내 한 몸 간수하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가,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몰라도, 5년 전 어느 날 회사에 출근하고 나니 숨이 턱턱 막힌다는 그에게 뜬금없이 말했다.
"태국으로 와, 자기야. 숨 막히는 건 한 사람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