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꽃말은 ‘중간고사’라지. 4월엔 캠퍼스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강의실과 도서관과 과방을 오가며 사진을 찍는 것으로 벚꽃놀이를 대신하고 ‘벚꽃놀이 가고 싶다’는 말을 주고받던 일상이 흘렀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강의실을 나서면 벚꽃은 지고 겹벚꽃이 한창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에 학교 밖의 장소로 벚꽃놀이를 갈 생각도 못하던 나는 성실하고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졸업을 하고 보니 사람들이 주말에 대학교로 벚꽃놀이를 간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있던 곳이 꽃대궐인 것을 그 안에 있을 땐 모른다.
대학원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하면서 중간고사 기간은 다시 찾아왔다. 나는 졸업한 학부의 전공과 대학원 졸업 기준에 따라 학부에서 세 개의 수업을 들어야 했다. 강의 계획서를 보고 시간을 맞춰 수강 신청을 했는데, ㅁ 교수님의 ‘수묵화’ 수업을 신청한 일은 대학원 동기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작품 활동에도 열정적인 ㅁ 교수님의 수업을 잘 신청한 것이었다. ‘수묵화’는 실기 수업이었다. 한지를 B5 용지 크기로 자른다. 우드락을 그보다 조금 더 크게 잘라 화판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가벼운 화판에 한지를 받치고 벼루와 먹, 세필붓을 함께 들었다. 수업 시간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돌과 나무를 그렸다. 어느 날은 건물도 그리고 비 내리는 풍경도 그렸다. 수업이 없는 날엔 『계자원 화보』를 보며 따라 그리고 주위의 자연과 사물을 그렸다.
날씨 좋은 4월에는 야외스케치 수업이 있었다. 야외스케치 땐 편의를 위해 드로잉북과 펜을 준비하라는 안내와 함께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중간고사 기간에는 덕수궁에 가야 해.”
이전에 수문장 교대식을 보며 덕수궁 앞을 지나간 적만 있었다. 나는 야외스케치 수업 날 덕수궁의 대한문으로 처음 들어가 보았다. 평일 낮임에도 카메라를 든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수업 모임 장소인 함녕전과 정관헌 사이로 갔다. 그곳에는 <화왕계>의 호화스러운 품위를 간직한 모란이 피어 있었다. 모두들 모란의 아름다움을 보러 온 것이다. 관람객들은 모란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는다. 학생들은 작은 드로잉북과 펜을 꺼낸다. 그리고 모란을 관찰하며 그린다.함녕전 뒤편의 모란은 높이가 1m가 되지 않는다. 자주색, 분홍색, 흰색의 꽃송이가 손바닥보다 커다랗다. 모란은 얇은 꽃잎이 여러 겹 쌓인 모습으로꽃잎의 가장자리가 매끄럽지 않아 저마다 개성 있다. 꽃송이 안에는 붉은색 암술이 서너 개 있고 노란색 수술이 가득하다. 꽃받침은 다섯 개, 잎은 세 갈래로 나눠진다.
햇살이 뜨거웠다. 가만히 앉아 모란을 그리고 있으니 교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자세가 됐어. 넌 진짜 화가가 되겠다.”
교수님은 평소 다른 학생에게도 화가가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를 향한 말을 듣는 것은 새롭고 특이한 일이었다. 교수님에게는 일상적인 담소이자 의미 없는 격려였겠지만 내 마음엔 자리를 차지했다. 오래 기억할 찰나였다.
일주일 후 피드백하는 날 보니 다른 학생들이 느낌 있게 그린 모란이 많았다. 내 모란은 그저 그랬다.
졸업 후에도 나는 봄의 중간고사 기간에는 덕수궁에 간다. 입구의 오른쪽엔함녕전과 정광헌 사이보다 더 높은 2m 정도의 키로 모란이 피어있다. 모란이 피는 시기엔 철쭉, 매발톱꽃, 죽단화, 금낭화도 덕수궁을 아름답게 만든다. 멋진 말을 들었던 찰나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