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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ul 04. 2024

가나 망의 대부 아프코 그룹 김복남 회장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에서 가나의 테마까지 300해리가 좀 안 된다.

아비장에서 비료를 반 정도 풀어주고 나머지를 하역하러 테마로 향했다.

평균 15노트로 20시간 남짓 항해하면 도착한다.


가나에는 대서양 동쪽의 라스팔마스 원양 어업기지보다 적지 않은 기지가 있어 한국어선 관계자가 많이 살아 한국말을 하는 현지인이 제법 있다.

현지 왜소한 젊은이 한 명이 배에 올라와 설거지와 청소를 할 테니 밥만 먹여달란다.

새로운 경험이지만 그렇게 하라 하고 당직이 아닌 선원 몇이 상륙 나갔다.

전에 여기 와본 적 있는 선원이 시멘스 클럽에 가면 풀장이 있고, 수영하며 놀다가 바비큐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가나 인접국들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불어권 국가들인데 가나는 영국의 지배를 받아 영어 문화권 나라이다.

자기들을 말할 때 가나 망(Ghana man)이라고 들린다.

부두에 있던 훤칠하고 잘생긴 한 가나 망이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하며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야자 소주가 맛있다고 먹어보라 한다.

맛이 깔끔해서 큰 페트병 하나에 십 불인가 주고 사서 시멘스 클럽으로 갔다.

독일인 선교사가 반긴다.

풀장에는 북유럽 선원인지 신나게 놀고 있었다.

가족인지 선원인지 젊은 여성 세 명이 토플리스로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며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난리 친다.

처음엔 '앗 뜨거라!' 했는데 한구석에서 수영하며 고기 구워 야자술 먹으면서 자꾸 보니 암시랑 안 하더라.

지나 나나 사람으로 있을 거 있어서 건강하게 살면 감사한 게지.


롯데 가나 초콜릿의 상표명이 이 나라 이름일 정도로 카카오가 많이 나고 수출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주머니가 늘 비어있어 초콜릿을 못 사 먹는다고 한다.

풍부한 물과 기름진 땅 덕에 농사가 잘된다.

북쪽에서 시작한 볼타강이 서쪽을 가로질러 기니만으로 흐른다.

그 강을 막아 세계에서 제일 큰 인공호수를 만들어 댐에서 전기를 생산한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이남에 유럽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 지금의 가나라고 한다.

포르투갈은 대항해를 시작한 15세기 중엽에 가나 땅에 도착하여 엘 미나 성을 만들었다.

그 무렵 가나에는 길 가다 발에 차이는 게 황금 원석일 정도로 노천에 금광석이 지천으로 깔렸다고 한다.

포르투갈인들이 이곳에서 사금을 채취해 가면서 유럽인들 사이에 '황금해안'으로 알려졌다.

전 출항지 아이보리코스트는 상아해안, 그 옆의 라이베리아는 곡물해안, 시에라리온은 후추 해안, 나이지리아 인근 해안은 노예 해안이라 불렀다.


막대한 양의 금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유럽 여러 나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오랫동안 다투었다.

17세기 중엽 포르투갈이 쇠퇴하고 세계 해양 패권을 장악한 네덜란드가 엘 미나 성을 중심으로 노예무역을 했다.

여기서 팔려나간 노예는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아프리카 전역을 합치면 천만 명이 넘는 노예가 유럽, 미국 그리고 중미로 팔려 갔다.

노예들은 팔려 갈 때까지 화장실, 세면장도 없는 지하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하게 지냈다.

혹 삐딱하거나 반항하면 본보기로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반쯤 패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874년 영국이 점령했고, 이후 1957년 독립하여 영국 연방의 자치령이 되었다가 삼 년 뒤 정식으로 가나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가나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그나마 정치체제가 안정되어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일본이나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보다 더 낫다고 한다.

지금은 잘못 살지만, 해상 석유가 계속 발견되고 현재 성장세를 유지하면 중진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고 좀 지나면 가나의 GDP가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최상위권이 될 성장 원동력이 갖춰져 있다고 한다.




한국, 가나 수교 전인 1976년 테마항에 김복남 씨가 AFKO수산을 만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오징어잡이 배도 탔고 해군 하사관으로 전역한 후 1969년 가나에 주재원으로 왔다.

얼마 후 오일 파동이 와 경영난에 허덕이던 지사가 가나를 떠날 때 다 팔고 남은 낡은 어선 두 척을 처분하려고 남았다.

그게 여의치 않자, 그가 인수해 AFKO수산을 차렸다.

Africa Korea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어종이 다양하고 고기가 많았던 황금해안의 기니만에서 고기가 잘 잡혀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됐다.

어선 17척에 한국인 직원 이백여 명, 현지인 직원 천여 명이 선단을 이루었다.

부자가 되었어도 그는 나누는 삶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가나에서 번 돈은 가나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현지인 직원 가족 숙소와 농업학교, 농장 등을 만들었다.

나 같은 인간은 형편 풀리면 내 입과 내 가족부터 챙길 건데, 그는 가나 직원 숙소를 먼저 만들고 그다음 한국 직원, 마지막에 가족과 본인을 위해 쓰는 스타일이었다.


김복남 회장은 현지인에 밥 한두 끼 공짜로 주는 것보다 자립할 수 있는 기술과 정신을 가르쳐주는 게 바른 것이라는 생각으로 농업학교와 농장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다.

가나에서 벼농사는 삼모작이 가능하나 지력 소모를 줄이려고 이모작하며 연간 250여 t이 생산되어 거의 직원과 교민이 먹는단다.

돼지우리와 양계장, 배추와 상추 등을 키우는 밭도 있다.

거기서 배출된 농업 후계자가 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가나 망들에 김 회장은 농업학교장, 태권도 아버지 또 사회사업가였다.

그는 자비로 태권도 사범을 모셔 와 군과 경찰,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배우게 해 정신력과 체력을 키웠다.

그리고 LA와 서울올림픽 당시 경비 문제로 참가를 포기하려던 가나 선수단에 왕복 항공료와 출전 비용 전부를 부담해 가나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단을 이끌고 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다.

가나 학생뿐만 아니라 속초의 모교 영랑초등학교, 속초 중고교 학생들에게 해마다 장학금을 주었다.


그는 갔지만 수많은 가나 사람과 한인의 가슴에 남아있다.

"가나 망이여, 깨어나라. 한국인이여,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보라."

대서양을 누비는 아프코 선단의 어선들, 가나 땅에 벼와 가축들이 자라는 푸른 농장에서 일하는 가나 망과 속초의 후배들 마음속에는 김복남 회장의 꿈과 열정이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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