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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ul 20. 2024

바레인과 걸프 전쟁

백만 대군의 후세인 정권 몰락


미국 선주 유조선을 타고 바레인에 원유를 실으러 간 적이 있다.

아라비아해에서 대기하다가 선주가 출발하라는 시간에 등화관제를 하고 페르시안 걸프를 통과했다.

평상시 불빛에 휘황찬란했을 부두가 칠흑같이 어두웠다.

배를 원유 부두에 붙인 후 수속을 마치고 한숨 돌리는데 자정쯤 배 위로 뭔 불빛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튿날 아침 대리점 직원이 신문을 들고 와서 이라크가 쏜 스커드 탄도 미사일이 바레인에 몇 개 떨어졌지만, 다행히 불발탄이었다고 한다.

아, 뭐야?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침공해 전쟁 난 건 알고 있는데 왜 바레인에까지 미사일이 떨어지고 난리냐고...


걸프 전쟁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자국의 군사력을 믿고 쿠웨이트를 침공해 유전을 빼앗으려는 도둑놈 심보였다.

당시 이라크는 이란과의 8년 전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무력 사용을 승인한다.'라고 결의했다.

이라크가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삼십여 나라가 UN 다국적군을 보내 백만 대군의 이라크와 전쟁을 치렀다.

우리나라도 군 의료진과 비전투병을 파병했다.

이 걸프 전쟁은 다국적군이 이라크에 공습하면서 시작되어 40여 일 만에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다국적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이라크를 압박했다.

이 작전은 이름과 같이 최신 무기들을 폭풍처럼 쏟아부었다.

다국적군의 폭격으로 이라크가 초토화되자 후세인은 두 손 세 발 다 들었다.


본선에 파이프로 시간당 12,000t이 쏟아지는 원유는 파이프 두 개만 꽂으면 반나절에 십여만 톤 선적이 끝난다.

오전에 잠시나마 시내에 상륙을 나갔다.

모처럼 땅도 밟을 겸 필요한 물건 좀 사고 맥도널드에서 만 날 먹는 뱃밥이 아닌 육상의 신선한 햄버거와 펩시로 간단히 요기하고 돌아왔다.

중동은 소련처럼 코카콜라보다 펩시가 강세이다.

시내는 오일 달러 때문인지 멋진 건물이 많이 보이고 도로와 거리가 깨끗했다.

중동의 대부분 항구가 사막에 있어 모래밖에 보이지 않는 것과는 달랐다.

중동의 파리라든가?

아니, 중동의 압구정동...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을 잇는 씨 브리지에는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사우디 차량이 엄청 들어온단다.

불금에 잠시나마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려는 사우디인들이 바레인으로 오기 때문이다.

사우디왕국은 국민을 이슬람 교리로 엄격하게 통제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손꼽힌다.

최근 여성의 운전과 비키니가 허용되는 등 변화하고 있지만, 자국민들의 억눌린 욕구를 풀어주기엔 턱도 없이 부족하다.

그런 사우디인들에게 바레인은 아주 훌륭한 휴식처이다.


바레인은 이슬람국가이면서도 서구문화에 관대하고 개방적이라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돼지고기와 술도 이곳에선 마음껏 먹을 수 있다.

특히 마나마에는 클럽이 많아 젊은이들에 인기 짱이다.

바레인은 예로부터 중계무역을 하며 외부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슬람 율법에만 얽매이지 않고 상당히 자유스럽다.

식당과 호텔 등에서 술과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게 대표적이다.

바레인이 이처럼 개방적으로 가는 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바레인 인구의 반 이상이 외국인이고 그들은 바레인 경제의 중요한 인적 자원이라 정부는 사회,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기 위해 정책적으로 배려했다.

그래서 바레인은 중동에서 외국인이 거주하고 근무하기 좋은 국가로 소문났다.

아랍권에서 처음으로 유전이 개발되어 석유 판 돈만으로 부를 누린 적도 있지만, 땅이 좁은 바레인의 석유매장량이 주변 산유국보다 매우 적어 살길을 찾아 산업 다각화를 꾀했다.


중동 건설 붐이 불었던 칠팔십 년대 한국인들에게 바레인은 중동의 관문으로 통했다.

당시만 해도 중동으로 가려면 비행기를 두어 번 갈아탔는데 바레인으로 가는 직항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시기 바레인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주로 인프라 건설에 참여했다.

수도 마나마 시내의 많은 건물을 한국인이 공사해서 만들었다.

현대그룹 또한 바레인 조선소 공사를 수주하며 중동에 첫발을 내디디고,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항구 공사도 땄다.

20세기 최대의 역사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공사였다.

그때 현대가 벌어들인 외화는 엄청났다.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단체인 알카에다가 민간기를 납치하여 뉴욕에 있는 세계 무역 센터 빌딩과 국방부 청사에 연달아 자살 충돌시켰다.

이 사건 후 미국은 테러 주동자인 빈 라덴에게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걸프 전쟁을 일으킬 당시 아빠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에게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라 말했다.

또, 이라크가 대량 살상 화학무기를 가지고 있기에 세계 평화를 위해 없애려고 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개입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모두 석유 확보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미국은 여기에 더하여 전쟁을 일으켜 경제 침체에서 벗어날 속셈이었다.

특히 미국의 무기상들은 신무기를 실험하고 재고 무기를 다 털어 없애려는 꿍꿍이가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많은 미군 사상자를 우려했던 걸프 전쟁에서 단시간에 승리하여 후세인을 사로잡아 처형시켰다.

그러나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 살상 화학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하여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의붓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던 어린 후세인은 집을 뛰쳐나왔다.

이라크 육군 장교 출신으로 교사인 외삼촌 집에서 성장하며 훗날 대통령이 되는 알 바크르를 비롯한 장교들과 두루 인맥을 쌓았다.

젊은 후세인은 아랍 통일을 위한 반정부 활동에 참여하다 잡혀 투옥됐다가 동료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첩보 기관의 수장이 되었다.

아랍은 부족이 살해당하면 그 살해범에게 반드시 보복해야만 명예를 지킬 수 있다는 피의 복수 관습이 있어 아무도 그 자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후세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후세인은 첩보 기관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반정부운동을 차단하고 정적들의 약점을 잡아 고문하거나 처형하여 독재 권력을 강화했다.

결국 대통령의 신임을 톡톡히 받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부통령 자리에 오른다.

부통령 재직 때는 대통령을 깍듯이 모시면서 석유 국유화를 주도하고 유가를 올리는 데도 앞장서는 등 정치를 아주 잘했다.

쿠데타와 잦은 분란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이라크의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고유가로 번 돈으로 사회 인프라를 잘 정비하였다.

대표적인 정책은 의무교육과 문맹 퇴치, 고속도로와 전기, 전화 보급 등이 잘 진행되어 이라크를 전보다 잘 살게 했다.

그런데 이인자가 아닌 대통령이 된 후 독재로 돌아 이란, 이라크 전쟁과 걸프 전쟁 등 두 차례나 전쟁을 치러 나라 살림을 거덜 내고 본인도 교수형으로 돌아가셨다.

미군에게 잡혀 재판받을 때 살려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당당하게 사형을 받고 목을 맸다고 한다.


백만 대군의 잘 훈련되었던 이라크군이 참패하고 후세인이 죽자, 북쪽 아저씨들도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십 년이 넘는 재임 시절 그와 똘마니들은 반대파를 잔인하게 고문하고 셀 수 없이 숙청했다.

특히 콜라병에 앉으라 해서 항문 파열과 과다 출혈로 죽게 만드는 등 그 방법이 저 윗동네보다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이라크에 대량 학살 무기가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이미 쿠르드족 등 40여 개 마을에 독가스 등을 다 써서 후세인이 잡힐 당시 대량 살상 화학무기가 남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후세인이 죽은 후 백성은 더 못 살고 치안 부재에 시달리다 보니 이라크 내전 이후로는 후세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사람 사는 게 어찌 된 판인지...

어쨌든 후세인은 선량한 백성을 너무나도 많이 죽인 극악무도한 피의 독재자로 손톱만큼이라도 동정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내 무덤에 침을 어라.'라는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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