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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분홍'에 대한 생각

by 대은


꽃무늬나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옷을 사 본 적이 없다. 내 옷은 대부분 면으로 된 회색, 검은색, 갈색이다. 옷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얘기도 되고 더 정직하게 말하면 색을 맞춰 근사하게 옷을 입는데 소질도. 좀 더 발전하고 싶다는 의지도 없이 게으르다는 증거가 되겠다. (면 옷이 아니면 몸이 간지럽기도 하다)


그래서 결혼할 무렵부터 시어머니는 날 무척 불만스러워하셨다. 본인 표현대로 '돈이 없어 못 하지' 예쁜 물건, 비싼 물건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던 시어머닌 젊은것이 맨날 우중충한 색을 입고 다닌다고 아주 못 마땅해하셨다. 결혼 초 어느 날엔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장 보러 나갔다가 시장 옷가게서 파는 노란색에 프릴이 달린 실내복을 사셨다. 집에 와 내게 입혀놓고 남편이랑 둘이 '얼마나 이쁘노, 얼굴이 다 확 사네' 하시는데 무슨 종이 인형이 된 양, 마음이 몹시 불편했던 기억도 있다. 친정엄마도 마찬가지. 난 길거리서 엄마를 보게 되면 슬슬 뒷걸음질 쳐 다른 길로 간다. (우린 한 아파트 앞뒷동에 살아 자주 마주친다) 엄마가 싫어서 라기보다는 얼굴 보자마자 '꼴이 그게 뭐냐'할 게 뻔해서. 엄마에게 우중충한 옷은 다 '꼴' 같잖은 것이다. 동네 시장 가는데 누가 외출복을 갖춰 입고 화장을 하냔 말이다. (울 엄만 하신다. 최소한 립스틱이라도 바르신다, 에휴)


작년엔 집 근처 쇼핑몰 옷 가게 앞을 지나다 짙은 감색이지만 살짝 하늘하늘한 천의 블라우스가 참 예뻐 보여 입어 본 적이 있었다. 탈의실에서 나와 거울 앞에 서니 거기 비친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깔깔대며 웃었다. 뒤에서 같이 거울을 들여다보던 주인아주머니는 잘 어울린다는 흔한 거짓말 대신 이런 스타일 옷을 안 입어 봐 그렇다는 바른 소리도 하셨다. 그래도 차려입어야 할 자리에 단정하게 입고 나간다고 생각하며 그저 나 생긴 게 이러려니 하고 살고 있다.


연초 멀리 사는 친구에게 선물을 받았다. 뭘 보냈는지는 이미 귀띔을 받아 알고 있었는데 열어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호주 사는 친구가 그곳에서 유명한 좋은 양털 슬리퍼를 보내줬는데 그게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바로 이것.


KakaoTalk_20220226_112908360 슬리퍼.jpg


난 오른편에 있는 갈색 슬리퍼가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남편 것이었고 내 것은 저렇게 분홍분홍 하고 앙증맞은 것, 로코코 풍 명화를 보면 양간하게 생긴 귀부인이 걸으려고 가 아니고 장식용으로 발끝에 걸치고 있는 것 같이 생긴 슬리퍼라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걸 어찌 나보고 신으라고, 내 취향도 어지간히 아는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보냈지? 하고.


그렇지만 어쩌랴, 친구의 고마운 성의가 있는데. 게다가 난 발이 항상 차가워 한여름에도 양말 신세를 지는 형편이니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저 슬리퍼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신고 있지만 볼 때마다 실실 웃음이 났다.


그런데 며칠 전 친정에서 막내네를 만났다. 유럽에 갔다 온 조카가 선물을 사 왔는데 영세만 받고 성당에 안 나가는 녀석이 신통하게 바티칸 정식 성물 판매소에서 사 왔다며 묵주를 꺼내놨다. 성물 판매소에서 교황님이 축성하신 거라 했다는데 진짠지는 모르겠다 하길래 우린 성물을 실은 트럭에 축성하신 거다, 아니 성물 판매소 앞에서 하신 거다, 아니 그냥 했다친 건 아닐까 하고 우스개를 해가며 구경을 했다. 할머니 즉 나의 엄마에게 먼저 고르시라며 묵주 셋을 보여 드렸는데 하나는 하얀색, 하나는 나뭇색, 마지막 하나는 그야말로 알록달록, 중국풍이 나는 화려한 묵주였다. 당연 엄마가 제일 화려한 걸 잡으시겠지 했는데 웬일로 이렇게 예쁜 건 젊은 애들이 하고 난 하얀 걸로 할랜다 하셨다. 다음으로 내 차례가 왔는데 얼라, 빨간색 초록색이 점점이 박힌 묵주가 내 눈에 딱 들어왔다. 이럴 수가!


평소대로라면 당연히 나뭇색 묵주를 망설임 없이 잡았을 텐데 그건 어찌 생겼는지 지금도 기억이 안 나고 무겁기도 화려하기도 한 묵주가 먼저 손에 잡혔다. '와, 참 예쁘다' 했더니 조카 녀석이 얼른 '고모, 그거 고모 가지세요' 한다. '너 여자 친구도 천주교 신자라며, 걔 갖다 줘' 하니까 손사래를 치면서 '걔는 괜찮아요, 그건 고모가 가지세요'한다. 그래서 가졌다.


KakaoTalk_20220226_104758558_01.jpg 저 작은 묵주알에 박힌 무늬가 다 다르다


집에 와서 묵주를 찬찬히 만져보며 참 희한하다 생각했다. 왜 이 묵주가 눈에 딱 들어온 걸까? 내 취향이 전혀 아닌데~~ 그러다 문득 분홍분홍한 슬리퍼가 떠올랐다. 아~~ 그랬구나, 정말 그렇구나.


전혀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분홍분홍 그 색이 공연히 기분을 즐겁게 했고 그게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저 알록달록 묵주에도 눈길이 갔구나. 사소했지만 안 가져본 변화가 나를 아주 조금 바꿔버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 나도 늙어 화려한 것에 마음이 가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 친정에 들른 길에 엄마가 너 잘 왔다 하면서 꺼내 놓은 빨간 바지에 기겁을 하고 도망 나온 걸 생각하면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신빙성이 있다.ㅎㅎㅎ(그러고 보니 두터운 외투를 벗기는데는 차갑고 사나운 바람보다 따뜻한 햇살이 훨씬 효과가 있는게 확실하다)


조금씩 다르게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 한 방향으로 오래오래 살아왔으니 살짝 방향을 틀어 보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쓰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는 또 실실 웃는다.

KakaoTalk_20220226_112849975.jpg 맨발로 신으면 더 따뜻해



덧,

KakaoTalk_20220226_133650840.jpg 조카가 오르세에서 찍어 보내준 고흐의 그림

원본보다야 조금 못하지만 직접 본거랑 제일 비슷한 사진이다. 구글 이미지에서 아무리 찾아도 이 만큼 빛나는 느낌이 잘 살린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반짝반짝 별이 빛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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