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린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져 택시를 타고 시집으로 향했다. 양손에 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어수선한 마음으로 들어가기 싫어 아파트 입구에 내려 달라 했다. 거기 상가에 있는 무인 카페에 마침 아무도 없어 잘 됐다 하고 들어갔다.
커피를 뽑아 남편과 마주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는데 남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석 달만 있었음 만 아흔넷을 채우셨을 테니 장수하셨다 할만하다. 그렇다고 죽음이 당연해지진 않는다.
"주말에 파마도 하시고 목욕도 하시고. 그날 점심엔 찹쌀 전병을 드시고 싶다셨대요 요양사님이 기름 둘러 동전만 한 전병 일곱 개를 부쳐드렸더니 두 개 남기고 다 드셨대요. 커피 달라셔서 돌아섰는데 컵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돌아다보니 휠체어에 앉은 체로 정신을 잃으셨더랍니다.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아드님들 다 모인 후 세 시간 만에 돌아가셨어요." 문상 오신 분들께 대충 이렇게 말씀드린 것 같다.
문상객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더더욱 '참 좋게 돌아가셨다'고 말해주었다. 지향하는 죽음의 모습이라고. 가족들도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빨리 죽어야지 하는, 어르신들이 버릇처럼 하던 말씀도 한번 없으셨던 어머닌 요양사님께 백 살까지 살고 싶다는 속내를 보이셨단다. 서운하셨겠다 싶다.
당뇨에, 신장도 안 좋으셨고 십 년 전 파킨슨 진단을 받은 후 계속 상태가 심해져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6년 전부터는 상주하는 요양사님과 같이 사셨다. 요양사님은 자식보다 훨씬 더 잘 어머니를 보살펴드렸고 갖가지 솜씨로 입맛을 잃지 않게 해 드렸고 제대로 몸을 못 쓰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알뜰살뜰 살림까지 잘해주셨다. 우리는 못 알아듣는 어눌한 말씀을 멀찍이 싱크대 앞에서도 귀신같이 알아듣고 필요하다 시는 걸 해드렸으니 다 어머니 복이다 싶다.
흔히 주변에서 보는, 아니 '엄마'라는 틀에 매인 이미지의 그런 '엄마'는 아니셨다. 자식보다는 당신의 욕망이 우선순위였다. 그래서 때론 낯설고 때론 너무하다 싶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알아서 자신을 챙기시니 따로 속을 더듬어 헤아릴 필요도 덜했고 원하는 게 있으면 스스로 사서 즐거워하시니까 곁에서 보기도 좋았다.
내가 아이를 낳을 무렵은 당연히 아들을 둬야지 하던 때였다. 아들을 셋이나 두셨으니 이젠 딸도 괜찮지 않냐는 이웃의 말에 '난 한 번도 딸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노라' 하고 말을 자르셨다. 그 얘기를 들은 나의 막내이모가 너 딸 낳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하면서 눈을 찔끔 떴다 감았다 하며 겁을 내는 시늉을 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흘러 이십 년쯤 지나 '나야 이제 다 살았지만 젊은 넌 딸 없어 어쩌냐'하는 걱정을 건네셨으니 딸 없는 설움이 있으셨나 보다.
어머니 돌아가신 날 밤부터 남편은 난데없이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곁에선 알아듣지 못하게 웅얼웅얼~ 하기도 했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하여튼 하루도 안 빠지고 뭔가 궁시렁 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게 만들어 걱정이 되었다. 장례를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잠결에 장롱을 발로 차는 바람에 발가락 뼈가 부러졌네 마네 하며 소란을 떨기도 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데 속이 많이 아프나 싶어 커피 마시러 나간 길에 괜찮으냐고 물어봤다. 역시 덤덤한 얼굴로 '괜찮아' 한다. 엄마를 잃은 아픔보다는 조금은 삭막했던 모자 사이가 그리 끝이 난 것이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어머님 보내드리고 간단히 집 정리를 했다. 사십 년 가까운 긴 시간 드나들었지만 처음으로 제대로 열어본 어머님 옷장은 생전 취향대로 화려한 겉옷이 걸려 있긴 해도 한 사람이 구십여 년 살다 간 흔적이라 생각하니 참 소박하다 싶었다. 요양사님이 가지런히 넣어둔 속옷만 꺼내 따로 버리게 두고 영 버려야겠다 싶은 건 골라내어 봉투에 담고 나머지들도 한번씩 손을 거쳤다. 곁에서 거드는 이드님들더러 어머니 유품 중 갖고 싶은 거 가지라 했다. 남편은 오래전 네덜란드 출장길에 사 왔던 접시를 골랐고 막내 도련님 역시 스페인 출장 갔을 때 사다 드렸던 몬세라트의 검은 성모상과 어머님이 오래 모셨던 제일 큰 성모상을 골랐다. 난 어머님이 마음 쓰며 모으셨던 도자기 중 제일 오래 눈에 익은 걸 한 점 골랐고 나머지는 동서가 갖고 가겠노라 했다. 그 외 가구며 짐들은 큰 시동생에게 맡겨 다 정리하게 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설이 되었다. 시어머니 첫 제사가 되어버린 설 차례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장례 때부터 쌓인 피로가 가시질 않아 겨우겨우 음식 장만을 다 하고 뒷 설거지를 하면서 어머니께 전화해야겠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아차! 싶었다. 항상 이렇게 제사 음식을 다 하고 나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이제 끝내고 내일 제사만 모시면 됩니다' 그러면 어머닌 '수고했다. 간단히 해라' 하셨는데 이젠 전화 걸 필요가 없어졌음을, 어머님이 이 세상에 안 계심을 실감한다.
덧, 남편의 첫울음을 본 건 영화를 보고 나서다. 딱 이십 년 전 조조할인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뒷길 마당을 지나는데 갑자기 (그러고 보니 항상 느닷없이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우는 남편이네) 벤치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너무 놀라 어디 다쳤어? 왜 그래 왜 그래~~ 했더니 한참 통곡을 하다가 너무 자신이 애처로워 울었다고 말했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어쩌든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예전 젊었을 때 자신의 모습 같았다고, 공부해야 할 동생은 둘이나 있고 아버지는 술만 마시고~~ 하고 싶은 걸 다 포기하고 살아가려고 애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 가슴 아프고 힘들었다고 흐느끼며 말했었다.
지금 같았으면 등짝 한 대 휘갈기고 그 시절에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한 둘이냐? 별 시답지 않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랬을 텐데 그땐 나도 마음이 약해 한참 등을 쓸어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