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짐 싸서 떠난 여행 1편
아들의 전화를 받고 나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독일앱 다 지워. 못 가. 좌석 없대. 영국만 여유 있다는데? 영국갈래?
아들이 항공사에 근무하는 덕에 내 환갑 때 비즈니스 왕복 항공권을 받았었다. 그렇지만 엄혹한 코로나 시대에 여행은 개뿔. 내 환갑날, 난 낮엔 면역력 약한 엄마 먼저 오시라 해서 밥 해드리고 저녁엔 바깥출입이 잦아 오염 가능성이 높은 아들이랑 밥 먹느라 땀 뻘뻘 흘리며 두 끼 식사준비하느라 바빴다. 자기 환갑 때 한강 뷰가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던 남편은 내 환갑을 나중에 더 멋지게 해 주겠다 했던 약속을 아직 지키지 않고 있다. 상관없다. 어차피 그럴 줄 알았으니까.
어쨌든 몇 해 잠자고 있는 그 항공권을 빨리 쓰라고 해서 남편과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다. 친구들은 아들 덕에 비행기를 공짜로 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자기 같음 하루가 멀다 하고 외국으로 나가겠다 한다. 맞긴 하나 쉽진 않다.
처음엔 가슴 부풀어 이태리로 갈 것이냐 스페인 아니 요즘 한참 뜨고 있는 포르투갈로 갈 것이냐 하다가 빈 좌석 상황울 보고 아예 접었다. 그렇다. 직원이나 직원 가족 항공권은 빈좌석이 있어야 탄다. 아무리 환갑기념으로 준 선물항공권이라도 마찬가지다. 요즘 자주 나오는 뉴스가 인천공항이 꽉꽉 차게 여행객이 많다는 건데 비행기 좌석이 남을 리가. (출발이 이러니 환승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은 더더욱 힘들다) 겨우 숨통이 틔는 곳이 독일이었다. 안 가봤으니 잘 됐다, 독일 가자, 그러자 하고 이 도시, 저 장소 잡아 기차 앱도 깔고 숙소도 알아봤다. 아무리 싸고 좋은 숙소가 있어도 예약할 수가 없고, 조금 더 주고 환불가능한 숙소를 잡을 때도 최대한 끌다가 좌석 상황이 어느 정도 가능한 선이다 싶을 때 카드 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음 죄 날릴 위험이 있다.
어쨌든 이렇게 정해두고 트렁크 두 개를 거실에 내놓았다. 각자 필요한 걸 오며 가며 채워 놓고 있는데 마음먹은 날짜 사흘 전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우리가 신청해 둔 독일행 비행기가 만석이다 못해 오버부킹까지 됐다고. 그 언저리 날짜도 마찬가지 사정. 정말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가는 게 좋겠다는 아들 말을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트렁크를 쳐다봤다.
-어디가 제일 널널해?
-영국인데 거긴 두 번이나 갔다 왔잖아.
-벌써 이십 년도 넘었거든.
-오래되긴 했네.
그래서 우린 느닷없이 영국으로 여행을 갔다 왔다.
독일철도에서 영국철도로 앱을 바꾸고(말이 쉽지 이거 깔고 익히느라 고생고생했는데 ㅠ.ㅠ) 런던- 바스 -체스터- 요크- 런던으로 2주일 일정을 잡았다. 사실 내 욕심으로는 북쪽 에든버러로 가서 스코틀랜드도 두루 돌고 싶었은데 남편이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바깥으로 오래 나갈 때는 한쪽이 싫다는 일은 가급적 안 하는 게 좋다. 런던은 두 번 갔다 왔지만 바스, 요크는 이십여 년 전에 반나절 휘리릭 둘러보고 그만이라 아쉬웠다. 체스터는 삼십 년 전 남편이 고정적으로 출장 다니던 맨체스터에서 가까워 혼자 구경했던 곳이라고. 참 예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단다. 결국 우린 한 번씩 들여다본 곳을 다시 가기로 한 셈.
동생은 새로운 곳에 가지 뭐 하러 또 가냐 하고, 엄마는 내가 곁에 없는 게 싫어 돈 쓰고 고생하는 짓을 왜 하냐 성화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예정을 이틀 미뤄 눈썹이 휘날리게 여행 준비를 하고 비행기를 탔다.
난 비행기 타는 걸 정말 좋아한다. 공항 출국장 문만 봐도 가슴이 띈다셨던 아버지 유전자가 틀림없다. 하긴 영화 4편 보면서 주는 밥을 두 번이나 먹으면 딴 나라에 내려주는데 왜 안 좋겠나. 몇 년 전 이코노미 좌석에서 13시간 넘게 걸려 뉴욕을 갔다 올 때도 이노무 비행기가 왜 이리 빨리 가는 거야 하고 속상해했었으니 내 돈 주고 탈 마음 안 나는 비즈니스석에서야 오죽했을까.ㅋㅋㅋ
런던에 저녁에 도착해 이틀 워밍업하고 바스로 갔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급하게 이리저리 구하다 보니 숙소 형태가 다양해졌다. 바스에서는 옛 영국 숙소 같은 형태의 B&B에 묵었는데 중심가에서 조금 걸어야 하긴 해도 주택가 속에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이 숙소가 좋았던 게 그 유명한 로열 크레센트가 바로 뒤에 있어서다. 거기가 여기 짜잔!
아침 일찍 싸늘한 공기를 맞으며, 풀밭 습기를 밟으면서 다시 본 로열 크레센트는 정말 근사했다. 사십 대에 왔던 곳에 머리 희끗한 할머니가 되어 다시 오다니. 이곳 왼쪽으로는 빅토리아 공원이 있었는데 아름드리나무와 넓은 풀밭을 좋아하는 남편은 오히려 그곳에 반해 이틀 연달아 가서 뛰었다.
이틀 지나 기차 타고 체스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