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은 Jul 30. 2024

책으로 연 창문

 

 조카랑 헤어져 지하철을 탔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땀이 식으니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좀 전에 같이 가 본 오피스텔은 조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비해 말끔하고 공간도 여유가 있어 우리 둘 다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다. 저녁으로 녀석은 돈가쓰 아니, 돈카츠를, 나는 좋아하는 마제소바를 먹으면서 계약 전에 알아봐야 할 것들을 서로 챙겼다.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조카는 여전히 아기 같은 얼굴로 조잘조잘 학교 얘기를 늘어놓았다. 같이 커피라도 마시면 좋은데 다시 학교로 들어가 봐야 한다고, 대학원 형들이 얘, 어디 간 거야 하고 있을 거라 하는 바람에 지하철 역에서 서로 반대 방향의 차를 타야 했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편하게 앉아 책을 꺼내 무릎 위에 얹었다. 참 오랜만에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펴니 좋더라~~


 여름이 시작되면서 고전들을 읽어내느라 씨름을 했다. 언제부턴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했는데 마침 근처 도서관에서 이 책으로 강독을 한다길래 이거구나 하고 덜컥 신청을 했다. 이른바 벽돌책 깨기. 베개만큼 두꺼운 책 두 권을 읽어내야 한다는 부담을 제대로 깨달을 사이도 없이 다른 도서관에서 이래저래 알려오는 여러 강좌 소개에 마음이 홀려, 아니 마음을 홀려야 해서 클릭을 하다 보니 여름 내 무려 다섯 개의 강좌를 듣게 되었다. 


-돈키호테 강독

-셰익스피어 4대비극, 프랑켄슈타인, 폭풍의 언덕, 플로스의 물방앗간, 위대한 개츠비, 노인과 바다 등등등 인문학 강의

-이집트, 이슬람 문명 알기

-클래식 감상 

-한국 현대시 감상


ㅠ.ㅠ (제가 좋아서 신청해 놓고 우는 시늉을 하는 건 뭐람.)


 무엇보다 <돈키호테>가 제일 큰 부담이었다. 강의도 아니고 강독이라 미리 읽어가야 하고 같이 이야기도 나눠야 하니. 그런데 의외로 그 두꺼운 책은 술술 읽혔고, 의외로 세평처럼 놀라운 책이기는커녕 노망 난 영감탱이의 민폐놀음 종합판 같아 어디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할지 계속 오락가락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첫 시간, 고전전문해설가로 유명한 강사님은 책 내용에 앞서 그 시대의 종교, 정치, 역사, 가치관 등등 배경을 너무나 넓으면서도 깊고 또 세밀하게 일러주어 난 마치 눈 뜬 심봉사 마냥 입을 딱 벌린 채 끄덕끄덕만 해댔다. 


 고전을 수백 년이 흘러내려온 지금의 시선으로 읽어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금의 우리야 내 욕망, 내 안락, 내 권리가 우선이지만 세르반테스며 셰익스피어며 에밀리 브론테가 글을 쓰던 시절엔 우리의 욕망을 죄악시하는 서슬 퍼런 종교의 계율이 있었고 개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넘지 못하는 신분의 차이가 있었고 차마 제 이름을 내걸고는 글도 쓸 수 없었던 여자의 한계가 있었다고. 현대문학은 좀 성글게 읽어도 맥락이 잡히지만 고전은 가능하면 천천히 문장 한 줄도 그냥 넘기지 말고 자세히 읽어봐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강사님이 짚어 주시는 문장들을 이런 해설을 붙여 다시 읽어 나가자니 참 대단하다 싶은 구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 있었는데 비로소 눈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인문학을 말하고자 하니 이것은 분배에 있어 정의가 실현되게 하고 각자에게 제 몫을 주고 훌륭한 법이 이해되고 지켜지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소~~~ 하지만~~ 군사의 종국적인 목적은 평화요, 평화야말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원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오.' 당연한 이 구절이 빛나는 것은 한참 유럽 여러 나라와 터지게 전쟁을 하고 승리를 거두면서 잘 나가고 있는 즈음의 스페인이 배경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진정한 귀족은 덕에 있는 법, 당신이 마땅히 제게 지켜야 의무를 저버리신다면 그건 당신에게 덕이 부족한 것으로, 점에 있어서는 제가 당신보다 훨씬 귀족 인 셈입니다.' 신분이 아래인 자신을 유혹하고 버린 지체 높은 귀족에게 당차게 선언하는 말이다.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지~~~~내가 원하고 산초 자네가 필요로 하는 대로 되게 말일세.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돈키호테가 한낱 종자 산초 판사에게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하지만 우선 네가 널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했으니 책 뒷부분에 산초가 내가 교황이 못 될 것은 또 무엇이냐 하는 간 큰 말을 하게 되는 거 아닐까?

 

  이렇게 고전을 읽는 기본을 배우고 나니 그전에 읽었다고 마음 놓았던 <폭풍의 언덕>도, <위대한 개츠비>도, <노인과 바다>도 몽땅 새로이 읽어야 할 숙제가 된 데다 안 읽은 책도 많아 강의 전에 그 책들의 흔적이라도 읽느라 눈이 침침해지게 초여름을 보내야 했다. 


 아직 현대문학 강의도, 시 감상 수업도, 이슬람 문명 강의도 진행 중이지만 급한 불은 거의 다 끈 덕에 어제 조카랑 한 약속 때문에 집을 나설 때 잠깐 잊혔던 책을 가방에 넣고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폈다. 허태임의 <나의 초록 목록>.

허태임 식물학자가 사랑에 흠뻑 빠져 나지막이 말해주는 식물 이야기를 읽고 듣다 보니 저절로 웃게 되었다. 그리고 아, 아, 쪼끔 마음이 좋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 난 창이 날 숨쉬게 해준다. 책은 항상 그렇다.


좀풍게나무 잎자루가 떨어진 곳에 생긴 잎자국. 비니 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허태임 님 설명이 너무 따뜻해 웃고 말았다. 허태임 <나의 초록 목록>에서 가져옴


 

 



  

작가의 이전글 오늘도 마이너스 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