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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잉글랜드

후다닥 짐 싸서 떠난 여행 4편

by 대은


요크에서 사흘을 지내고 런던 가는 기차를 타려고 역에 서 있자니 마음이 놓이기도, 아쉽기도 했다. 런던에서 나흘을 지내면 집으로 간다. 육십 대 들어 처음 하는 긴 여행이라 출발 전까지 걱정도 많았는데 큰 탈없이 잘 다녀 좋기도 했지만 스코틀랜드로 올라가지 못하고 돌아가는 게 아까웠다. 언제 여기까지 또 올 수 있을까?


기차가 도착해 올라타려는데 역무원이 뭐라고 소리치며 못 타게 막았다. 어? 뭐래? 하고 있는데 남편이 얼른 옆칸으로 올라갔다. 왜 그러냐니까 우리가 타려던 쪽에 무슨 고장이 나서 다른 객차를 타라고 했다는 거다. 그런데 타고 보니 거긴 1등석. 다른 사람들은 더 뒷칸으로 가길래 우리도 2등석으로 가야지 했더니 남편은 괜찮다고 빈자리에 앉으란다. 역무원이 아무 칸이나 타라고 했으니 여기 앉아도 된다는 말씀. 내가 뭘 물어보라거나 못 알아듣는 설명을 우리말로 해달라면 모르겠다 하더니만 이런 얘긴 귀신같이 알아듣네. 덕분에 우린 1등석에서 생수 서비스도 받으며 편안하게 런던까지 왔다.


런던 유명한 관광지는 전에 왔을 때 대부분 가 봤기 때문에 이번엔 가능하면 미술관을 열심히 찾기로 했었다.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무리 좋은 그림이 많다 해도 양이 엄청나다 보니 나중엔 지쳐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거나 대충 건너뛰다 나오기 일쑤. 그래서 이번에 가능하면 여유 있게 다니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간 곳은 테이트 모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라 열흘 전 런던에 내린 다음날 아들이랑 같이 갔었지만 시간이 없어 꼭대기 커피숍에만 앉아 봤기 때문에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다. 이곳은 사실 전시 작품보다 미술관 건물 자체가 더 유명세를 타는 것 같기도 하다. 주제별로 전시를 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작품을 둘러보다 느닷없이 피카소를 만나기도 하고 모딜리아니를 보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남편은 금방 지루해해 편안한 의자에서 쉬라하고 나만 돌아봤다.

20241018_122437.jpg Vlassis Caniaris의 Image 1971

내가 여행객이라 그런지 저 작품이 눈에 들어왔는데 내 아버지랑 거의 똑같은 시대를 살았던 저 작가의 작품은 이민자의 이미지를 표현한 거란다.


20241018_112938.jpg 난간 너머로 보이는 작품은 중앙홀에 전시 중인 우리나라 이미래 작가의 오픈 운드(Open Wound)


하루에 미술관 두 곳은 무리라서 다음날 간 내셔널 갤러리. 내 런던 여행의 주목적지일 정도로 보고 싶은 작품이 정말 많아 힘들면 혼자 가겠다고 했는데 서른 개가 넘어 보이는 전시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같이 봤다. 아예 마음을 먹고 천천히, 의자가 나오면 쉬어가며 돌아 그런지 지치지도 않았고, 보고 싶었던 그림도 놓치지 않고 다 볼 수 있어 얼마나 좋던지!

그중에서도 단연 1등.


20241019_145407.jpg 램브란트의 마지막 자화상 63세


난 이 자화상을 어디선가 보고 램브란트가 정말 용감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모습을 저렇게 정직하게 그릴 수 있다니, 아니 쳐다볼 수 있다니. 바로 근처에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의 자화상이 있는데 그것과 비교해 보면 실감이 난다.



렘브란트 자화상.jpg 34세 때 (직접 찍은 게 없어 구글에서)


램브란트의 그림은 말 그대로 인생의 고락을 다 경험한 사람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 같아 항상 감동이 짙다.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 <돌아온 탕자>인데 이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미술관에 있어 언젠가 꼭 가서 보자고 결심하고 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볼 수 있어 좋았던 건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작은 방에 들어섰는데 이 그림이 딱! 있어서 나도 모르게 우와~~ 하고 소릴 질렀다. 그리고 나도 찍었다. 바로 여기^^


20241019_142618.jpg 그림 가운데 있는 작은 거울 속에 비친 이 부부의 뒷모습
얀 반 에이크.jpg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얀 반 에이크의 저 그림은 작은 크기지만 선명하고 표현이 묘해서 눈에 딱 들어온다. 이 그림엔 온갖 상징과 그에 따른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 보담 난 저 가운데 거울에 뭘 그렸는지 직접 찍고 싶었다. 물론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더 잘 찍어 선명한 사진이 있지만 그래도. ㅎㅎㅎ

집에 와서 확대해 보니 저 부부의 뒷모습과 함께 마주보고 있는 화가 본인 (거울 위에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고)과 다른 또 한 사람, 그리고 집안 풍경이 세세히 다 있다. 그리고 거울 가장자리로 예수 수난을 그린 열 개의 작은 그림도 있다. 저 그림의 크기에 비교해 보면 정말 섬세한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241019_152440.jpg 안토니 반 다이크의 <코르넬리스 반 데르 가이스트 초상화>

저 그림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어떻게 저런 눈망울을 그릴 수 있을까? 당시 이름난 사업가였던 저 사람은 왜 저리 젖은 눈을 하고 있었던 걸까? 오래 마주 서서 보고 있자니 까칠한 목소리로 '자넨 누군데 거기 서서 날 그리 쳐다 보나?' 하는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저 사람이 좋아졌다.ㅎㅎㅎ


내셔널 갤러리엔 정말 보고 싶었던 그림들이 가득했다. 홀바인의 <대사들>, 윌리엄 호가스의 웃기는 그림 연작 <결혼풍속도>, 터너의 <비, 증기,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페이메이르의 <버지널 앞에 선 여인> 등등등~~ 그리고 남편이 보통 때완 다르게 내내 같이 박자를 맞춰 주고 내 설명과 감탄사에 귀 기울여 줘 고마웠다.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더라.


그래서 남편이 좋아하는 자연사 박물관에 가서는 나도 열심히 잘 따라 다니며 구경했다. 그런데 자연사 박물관은 그 규모가 내셔널 갤러리엔 댈 것도 아니였다. 전시된 동물 표본이나 자료의 양도 어마어마하지만 건물도 구경하긴 벅차게 크다. 우리가 처음 들어갔던 본관 건물은 1870년대 지어져 1881년에 개관했다고 하는데 무척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20241021_115756.jpg 입구로 들어가면 보이는 본관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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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화석이나 동물 표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20241021_115924.jpg 기둥에 붙어 있는 원숭이(추정) 이런 장식을 볼때마다 만든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전세계 동물들의 박제는 물론 뼈를 복원한 것, 화석 등등 우리 지구 역사 속에 살아있던 동물들은 다 여기 있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어린이들이 많이 왔는데 뛰거나 떼부리지 않고 잘 따라 다녔고 열심히 설명해주는 아빠들도 많았다. 그중 제일 인기 많았던 곳.

생각보다 실감나서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다


런던에 갈 때면 항상 하이드파크 근처에 호텔을 잡는다. 새벽에 일어나 항상 혼자 (남편은 쿨쿨) 하이드 파크를 산책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랬는데 ㅠ.ㅠ 한 번도 새벽 산책은 못 갔다. 무서워서.


나이가 드니 여러 가지 새로운 두려움이 생겼는데 예를 들어 여행가방 한쪽에 혹시 해서 산 약이 한 다발이라든가, 화장실이 급할까 봐 어느 동네든 도착하면 무조건 큰 건물을 확인해 두는 것처럼, 혼자 인적 드문 시간에 공원에 가는 게 무서웠다. 20여 년 전이라고 해도 그리 힘이 센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무섭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이젠 사람도 무섭고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게 돼버렸다. 그래서 좀 슬프고 아쉬웠지만 매일 저녁 호텔로 돌아갈 때면 공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으며 내 마당이다 싶은 호사를 누렸으니 다행이다.


20241018_163349.jpg
20241018_163755.jpg 청명한 하늘
20241021_132454.jpg 아름다운 백조
20241018_165043.jpg 반전의 백조
20241018_163517.jpg 밤을 땅속에 숨겨두고 뒤돌아서다 딱 마주쳤다. 그야말로 흔들리는 다람쥐의 동공을 봤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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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히 시간 잡아 왔다고 했지만 세븐 시스터즈엘 못 갔고 지난번에 반쯤 보다 돌아왔던 그리니치 천문대도 제대로 보려고 했는데 못 갔다. 요크에선 스카버러에 꼭 가고 싶었는데 게다가 숙소 앞으로 거기가 종점인 버스가 오가는데도 못 갔다. 칠십이 낼모레임을 심심하면 강조하는 남편은 조금만 멀어도 가는 걸 부담스러워해 억지로 가자 할 수가 없었다. 세 번이나 왔으니 이번에 아쉬울 게 없을 줄 았았는데 여전히 못 한 게 남아 버렸고 함께 미련도 남았다. 이렇게 올 줄 몰랐듯 다음에 또 오게 되지 않을까?




20241021_154102.jpg 공항 가는 길에서 본 전철 표지판. 이쪽 지역에 인도계 사람이 많아 그런지 펀자브어를 같이 표가하고 있었다.



덧. 내가 찍은 사진은 정말 아휴~~. 런던에서 제일 좋아하는 랜드마크 타워브리지를 찍은 사진을 보고 아들이 한 소리했다. "어떻게 사진을~~"

20241018_142459.jpg 내가 찍은 타워브리지


202410 런던.jpg 아들이 찍은 타워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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