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콜로라도 아저씨.
이렇게 쓰긴 했는데 막상 아저씨에 대해 설명을 하려니 막막하다. 영어로 짧게 쓰는 이름(한국이름을 알파벳으로 바꿔)을 알긴 하지만 온전한 우리 이름은 알지 못한다. 젊었을 때 미국으로 이민 가 열심히, 정말 성실히 일을 하셨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모른다. 자녀는 물론 손주까지 가족들의 모습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나보다 예닐곱 살 많은 것으로 짐작만 할 뿐 정확한 나이도 모른다. 아저씨보다는 큰 오라버니 뻘이겠지만 한 번도 그렇게 불러 본 적도 없고 그 정도로 막역한 사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저씨랑 나는 거의 15년째 연말이 되면 크리스마스와 새해 인사를 나누어 왔다.
아저씨는 오래전 내가 열심히 하던 블로그의 이웃이었다. 그 블로그는 규모는 작았지만 끈끈한 이웃애로 뭉쳐 우리 모두 정말 친하게 지냈다. '온라인의 모임을 친하게 했다' 하면 좀 이상한 표현이긴 한데 진짜 그랬다. 우리 땅에 살고 있는 블로거도 있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고 있는 교포들도 많아 어쩌다 보니 나는 세계 곳곳에 친구들을 두게 되었고 콜로라도 아저씨도 그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다. 살고 있는 곳이 콜로라도라 그런 닉네임을 지으셔서 블로그 안에서는 콜로라도님이라고 불렸고 우리 집에서는 아저씨로 통했다.
아저씨 글은 남달랐다. 아니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달랐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현명하게 나이 든 어른의 글이기도 했고 젊은 마음의 글이기도 했다. 온통 백인 뿐인 땅에서 그만큼 자리 잡고 자녀들을 키우면서 겪은 일을 쓴 내용도 좋았지만 종종 올려주시던 미국의 독특한 사람들 모습은 내 마음을 확 끌었다. 박박 밀다시피 한 머리에 섬세하고 복잡하게 길을 내어 무늬를 만든 사람의 뒤통수 사진이나 옆 차선에 서 있는 아주 화려한 오토바이 사진, 혹은 별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의 사진을 올려 주셨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진을 찍으면 화내지 않을까 싶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솔직하게 멋있다고 칭찬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 선선히 사진 찍게 해 준다고. 동시에 그 사람의 사연도 알 수 있어 재미있다고. 그런 호기심과 열린 마음을 가진 아저씨가 좀 멋있어 보였다.
2010년 12월 말엔 규모도 어마어마하고 화려하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이웃집들의 사진을 올려 주셨다. 대형교회나 백화점을 넘어선 모습에 놀라 '우와 우와~~' 하는 감탄사의 댓글을 달았더니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는 답글을 다셨다. 그리고 바로 더 다양하고 근사한 장식의 여러 집 사진과 함께 미국 서부시대 느낌이 나는 사진들이 크리스마스와 새해 즐겁게 지내라는 기원과 함께 내 메일함에 도착했다. 이렇게 아저씨와 나의 연말 안부 메일이 시작된 것이다. (쓸쓸한 평원의 사진이 마음에 들어 한동안 내 컴퓨터 바탕 화면에 올려 두었었다)
십여 년 동안 아저씨는 새해 안부 말고도 집에 다녀간 손주들의 귀여운 모습이나 승진해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게 된 아드님 가족사진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요트 위에서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찍은 부인 사진도 보여 주셔서 아~~ 자유가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내 생활이라는 것이 맨날 고만고만해 특별히 가족 모습을 보여 드릴 게 없어 (손주라도 있었음 얼마나 좋아) 할 수 없이 여행길에 멀찍이서 찍은 내 사진만 보내드렸다.
게다가 재작년에는 내 아들에게 필요할 것 같다며 갖고 있던 좋은 가방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내 아들이 들고 다니면 유용하겠다 싶으시다고. 뜻밖의 선물 제안에 놀랐고, 평소 뭔가를 받는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편이었는데도 난 사양이라는 단어는 생각도 않고 네! 네! 저 주세요 했다. 왠지 아저씨한테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들에게 온 그 가방 속에 나를 위해 넣어주신 망원경도 있었다. 서프라이즈 선물이라고, 내내 아껴 쓰던 건데 이젠 여행 다니기 힘들어져 내게 주신다고 하셔서 정말 감사했지만 또 한편 마음이 아팠다. 건강히 여행 다니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들도 물론 그 가방을 좋아했지만 나야말로 밤하늘에 수퍼문이 뜬다거나 뭔 별이 가까이 온다거나 하면 이 망원경을 들고 이리로 저리로 신나게 쫓아다녔다. 이 얘기를 보낸 메일에 아저씨는 '요 근래 내가 제일 잘한 일이 그 망원경을 선물한 거라'라고 답글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가 되었는데도 아저씨에게서 메일을 받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보낸 메일도 수신확인을 클릭하면 '읽지 않음'이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처음엔 무척 걱정이 되었다. 몇 년 전 은퇴하신 후 갑자기 가게를 운영하게 되면서 무리를 하게 되어 심하게 앓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혹 덧나지 않으셨나 싶었다.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메일함을 열어 보다가 지난해 마지막 받은 메일을 다시 읽어 봤다. 짧은 안부 뒤에 '쓰고 있는 아이폰이 말썽을 부려 메일 쓰기가 어렵다'고 쓰신 구절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이 말썽이면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게 된다. 더구나 그 메일에 '제가 크리스마스 인사를 안 하면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실 테니~'라고 쓰신 걸 생각하면 설사 어디 아프시다 해도 메일은 주셨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었다.
-콜로라도 아저씨한테 전화해볼까?
-전화번호는 알고 있어?
-가방 보내주실 때 포장지에 쓰여 있었지.
-그럼 해보지 왜 망설이나?
그래도 하루를 고민하다 전화기를 들었다. 카카오폰으로만 전화를 하다가 일반 국제전화를 해본 게 얼마만인가. 갖고 있던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조심조심 전화기 숫자를 눌렀다. '헬로'하면 어떡하지? 아드님이나 따님이 받으면 날 뭐라고 설명하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신호는 가고, 갑자기 "여보세요" 하는 음성이 들렸다. 놀라서 어버어버 하다가 목소리로 짐작하건대 나이 든 분이시다 싶어 "콜로라도님, 저 대은입니다" 했더니 깜짝 놀라며 "하하하~~ 아이구 어떻게 전화를 다 해주시고~~" 하면서 웃으셨다. 아아아아아! 직접 받으셔서 정말 다행이다. 목소리도 쩅쨍하니 건강하시다!!!
콜로라도 아저씨 목소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젠틀하고 좋았다. 폰에 한국 번호가 찍혀 놀라셨다고. 내 메일도 못 받으셨고 평소처럼 크리스마스 때 메일을 보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수신을 안 한다고 도로 돌아왔더라며 잘 지내는지 물으셨다. 그렇게 십 오 년 만에 처음으로 음성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멀리 가 있는 오라버니와 얘기하는 것 같았다. 서로의 가족 안부와 함께 여전히 아들이 미혼이라고 속상하다는 내 말에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어찌 대해야 하는 지를 그 와중에 알려 주셔서 한참 웃었다. 전화요금 나간다고 그만하라 하셨지만 그래도 우린 한참 얘기를 계속했다.
작년엔 그동안 다니던 낚시도 뜸했다고, 이제 나이가 있으니 하고 살짝 섭섭해하셨지만 그래도 가족들 이야기를 할 땐 여전히 울타리처럼 목소리가 든든했다. 왜 메일이 도로 가버렸는지 왜 내 메일을 못 받으셨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 덕에 귀한 전화를 했으니 그걸로 됐다.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마음에 드는 여자 딱 잡는 법'을 아들한테 전수해 며느리 얻기에 성공한다면 크게 한 턱 대접해야겠는데, 정말 그리 되면 좋겠다. 하하하!!!